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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삼 선생과의 좌담회

 이근삼교수정년기념사업회는 이근삼 선생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자리가 별로 없이 행사가 진행되는것보다 수필집에서라도 이선생께서 충분한 말씀을 하시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판단, 이선생 과 주변의 몇몇제자들을 모시고 좌담회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분이 살아오신 얘기, 제자들이 경험한 이선생의 모습, 정년의 감회 등이 솔직하고 재미있게 얘기되었습니다. 이 난을 통해 이선 생과 후배, 제자들이 보다 의미 있는 참여공간을 발견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좌담은 1994 년 월 28 일, 서강대학교 다산관 5층 교수휴게실에서 있었습니다.

<참가자>

이근삼 선생
권성덕 (국립극단 단장 : 중앙대 연극영화과 ) 

김연종 (언론학 박사 :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75) 

김용수 (연극학 박사 :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73) 

김용호 (언론학사 : 서강대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83) 

김호석 (박사과정 : 서강대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87 ) 

최성실 (방송극작가 :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76) 

최용원 (동아일보 기획특집부 차장 :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72)

이근삼 선생님의 정년을 기념하여 저희가 내기로 한 [에세이집]은 각계 제자들이 이 선생님과 나누었던 경험을 적어 모은 것입니다 이런 글들에 앞서 이 선생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오늘 모임을 갖게 된 동기입니다. 

그러나 독백을 하기보다는 제자들과 경험을 주고 받으며 '연극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부담스럽지도 않고, 주변 분들에게도 쉽게 접근되리라 생각되어 이런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우선 선생님께서 정년을 맞으신 소감부터 말씀해 주시죠.

 

섭섭하다니? 전혀 ...

주위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정년퇴직하니까 착잡하지 않은가' 라고 물어보는데, 난 솔직히 말해서 그리 섭섭하지는 않아요. 52년부터 육군사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니까 벌써 43년이나 되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대한민국에서 교수생활을 가장 오래 한 사람중의 한 사람일 겁니다. 초창기 육사를 그만 두고서 동국대에서 스물 여섯살에 전임강사가 됐을 때는 제일 어린 사람이 됐다고 말도 많았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당시에 저는 참 어렸던 것 같아요.

 얼마 전 학장을 하면서도 인사위원회에서 항상 조기 은퇴를 했으면 좋겠다고 주장했어요. 학교 제도상의 미비로 못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 생각인데, 내가 오래해서 피곤하다는 이유에서라기 보다는 새로운 연구를 하고 오는 사람들도 많은데, 한 직장에서 너무 오래 앉아서 자리나 차지하는 것 같고, 오히려 그만 두면 일할 게 더 많을 것 같다는 착각도 있어요.

 그래서 '지금 섭섭하지 않느냐' 고 묻는 사람도 있는데 젼혀 그렇지 않습니다. 대학로에 가면 권성덕씨도 있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맥주도 마실 수 있고.. 얼마나 좋아요. (웃음) 또 대학 선생하면서 그동안 쓰지 못했던 글도 있구요.

그러면 학교생활 정리같은 것은 별도로 생각하지 않으시겠내요. 정년퇴임도 하나의 연장선상이라 생각하시니까, 은퇴라는 것이 선생님께는 별 의미가 없군요.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힘들었던 게 주로 양쪽에 다 관여했어요. 교수로서 책도 써야하고 논문도 써야하고, 극작가로써 희곡도 써야하고... 두 마리 토끼를 쫒는 식인데, 결국 교수로서든 극작가로서든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할까요?

그렇지 않아도 저희가 지난 모임에서 '선생님의 은퇴는 보통 은퇴와는 다르다, 오히려 이게 해방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선생님께는 보다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게 아니냐는 거였죠. 그래서 적극적인 의미에사 은퇴를 준비하셔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얘기들을 했지요.

그런데 나 은퇴하는 건 괜찮은데, 40여긴 같이 산 아내는 습관적으로 아침에 나가 밤에 들어오곤 하던 사람이 갑자기 집에만 있으면 아마 힘들어 할 겁니다. 나는 40년동안 아침을 안먹었는데 은퇴하면 아침, 점심도 챙겨줘야지, 또 봉급도 반으로 줄어들 테고..(웃음).

내가 알기로 아마 대한민국에서는 교수로서 내가 차를 맨 처음 끌고다녔을 거에요. 57년에 미국가서 2년동안 차를 끌고다녔으니까. 차얘기를 하면 생각나는 건데, 옛날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 애가 차 사고 난 튀로 차는 팔았어요. 차는 필요없다고 생각하는게, 오히려 나이 많은 사람들 차 잡기 위해서 왔다갔다 뛰어다니는 게 좋지 않아요? 지금 버스나 가끔 지하철을 타는데, 다른 사람들은 앉잖아요. 나는 서서 흔들어도 보고 부딪치기도 하는데 그게 건강에 좋지 않겠어요? 물론 일년에 한 두번 정초에 세배 다닐때라면 차가 좀 아쉽긴 하지만요.

선생님께서 저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 이북서 남하셨기에 가능했던 일이죠. 선생님께도 그 사건이 중요 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평양에서의 생활과 남하하실 때까지의 얘기를 정리해 주시면...

 

서울역 벤치에서 거지들과 자기도..

이북에서 넘어 온 사람이 지금 오백만이라는데 그 중에 한 명으로 뭐 특히 할 말은 없어요. 그 당시야 다 고생했던 시기니까요.

 왜정시대 때 내가 다니던 평양 사범학교는 교사를 양성하는 곳으로 5년제 였어요. 내가 4학년 때 해방이 되었는데 그 다음 해 2월 초에 신의주 학생사건이 일어나고, 평양에도 그 바람이 불어 저도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됐지요. 삐라 뿌린다, 뭐한다 그러다가 결국 추락당했지요. 그 당시 퇴학을 '추락'이라고 했거든요.

 퇴학맞고 도망다니는데 우리 어머니하고 큰 형님이 잡혀 들어가게 됐고, 결국 자수하고 학교에 복학해보니 내 동기인 신인섭씨 등은 다 5학년 수업하고 졸업했는데, 나는 유급되어 4학년으로 다시 들어가 반년 있다가 혼자 남하했습니다. 그 때 도망안나왔으면 지금쯤 평양에서 최소한 인민학교 교장은 했겠지요.(웃음)

 

자발적으로 혼자 결정하고 내려오신 겁니까?

아니지요. 우리 어머니하고 큰 형님하고는 '일단 도망가야 되겠다.'면서 '나중에 뒤따라 내려간다' 하셨지만 못 오셨지요. 나만 내려와서 고생도 많았어요. 서울역 벤치에서 자기도 했구요. 거지들 자는데 가서 자는데, 거지들이 발로 차 잠자리를 빼았기기도 했고, 또 내가 그렇게 차지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신문에서 가정교사 구한다는 기사를 보고 간신히 자리를 잡았죠. 보통 가정교사는 한명만 하는데 주인집 모르게 둘 더했지요. 날 때까지 하루에 보통 세곳에서 가정교사하면서 공부했어요.

평양에서의 선생님 가족들은 어떻게 되셨어요?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지 3일 후 돌아가셨으니 잘 모르고, 큰 형님은 다음 해에, 작은 형님은 1,4 후퇴 때 다 넘어왔죠.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과부로 고생하시며 처음으로 집 장만하셨기 때문에 통일되면 내려오신다고 단순하게 생각하셨는데, 그게 이별이 될 줄이야... 그러다가 작년에 미국에 있는 친척으로부터 어머님이 84년에 진남포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계시니깐 고향인데... 이젠 서울서 40년 살았으니까 서울사람이죠 뭐.

특별히 고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으시구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어머니 소식 듣기 전에는 고향에서 놀던 꿈도 꾸곤 했는데, 이상하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깐 꿈에 고향이 안나타나더라구요. 고향이라는 곳도 태어난 장소라기 보다도 부모와 친지가 거기 계실 때 그리운가 봅니다.

가정교사 생활 이후에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29년생이 어떻게 대학교수가?

가정교사 하다가 결국 대학 3학년 때 6.25가 났어요. 그러니깐 여기 넘어와서 공부라는 건 제대로 못했죠.

그럼 입학은 어떻게 하셨어요?

<거룩한 직업>은 5·16 직후 혁명정부가 교포들의 생활상을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을 일본에 보내기로 했는데, 문화사절이라고 나보고도 가달라고 해서 가기로 되어있는 전날, 우연히 문공부 차관을 역임한 정병조 선생 댁에 놀러 갔다가 들은 얘기를 소재로 쓴 거에요. 얘긴 즉 김계숙 선생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훔쳐갈게 없으니까 왈, ‘거지 같은 교수’라고 욕을 하고 나갔대요. 아침에는 일본으로 가야 하는데, 밤 10시에 집에 돌아와서 이튿날 새벽 6시까지 끝낸 작품이 바로 이 <거룩한 직업>이에요. 그때 실험극장은 최초로 허규씨 연출로 단막극을 공연해서 성공했죠. 그리고 났더니 장막극도 한편 써달라고 해서 쓴 것이 제 최초의 장막극인 <위대한 실종>(1963)이었어요. 

혜화 전문에서는 뭘 전공하셨는지요?

불교전문 학교이기 때문에 불교학과하고 경제학과, 문과 3개 밖에 없었어요. 해방 전에 전문학교는 연전, 보전, 혜전 셋 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연전, 보전 쪽은 전통이 있는데, 혜전은 불교학교라 선배들이 좀 떨어지는 편이었죠. 선배들이 누가 있어요? 서정주씨라든가 작가들은 많이 나왔죠. 그런데, 1년 다니니까 갑자기 학교가 없어지더니 남산 꼭대기에 동국대학이라는게 생겼죠. 거기에 2학년으로 올라가면 된다고 했는데, 편입금을 낼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다른 학교에 갈 생각도 못하고...

이북에 먼저 간다는 착각에 군으로..

6.25 때는 그럼 어디로 피난가셨어요? 군으로 들어가셨어요?

그래요. 그 때 군대 들어가면 이북에 먼저 간다는 착각도 있었지요.

일반 사병으로 들어가셨나요?

소문에 대학생들은 훈련시켜서 이북에 선전 공작원으로 보낸다고 해서 좋아라 지원했더니 차로 사흘이나 걸려 내려와서 부산의 통신학교에 넣더라고요. 당시 고대 이문형씨, 박찬기씨 등도 있었어요. 전쟁나서 자꾸 사단이 많아지고, 일반 보병들은 총쏘는건 가르치는데 통신에서 쓰는 모르스  부호 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이것이 커뮤니케이션과 관계를 맺게 된 인연인지도 모르지요.

그 훈련을 석달 받고나니까 모든 훈련병에게 일등병을 달아주는데 나는 반장이라고 하사를 달아주고서 전부 전선으로 보냈어요. 나와 몇명은 육군 본부 통신감실 보안과에 보내졌는데, 조금 있다가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이왕이면 장교를 하겠다;는 생각에서 통역장교로 시험쳐 들어갔지요.

그럼 통역장교로 계시면서 육사교수로 발령받아 그리 가신 겁니까?

통역장교는 통역만 하는 사람들인데, 난 어떻게 태백산 전투사령부로 파견되었고, 사령관은 나를 통역관이 아닌 부관으로 썼어요. 그 때 육사가 생겼고 영어 잘하는 사람을 뽑았는데 그 때 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우연히 뽑혔지요. 육사에 들어가니 지금 서울대 ㅊㅇ장인 김종운씨, 부총리였던 조순씨, 그리고 서울대 교수인 황찬호씨가 있었어요.

선생님도 모르는 사이에 명단이 올라가서 차출이 되신거군요.

글쎄 그 명단에 이름이 똑같은 사람이 있어서 내가 끌려 간건지는 모르겠지만,,하하하

52년에 군대 있을 동안 대학졸업장은 주더군요. 55년 되니까 동국대에서 교수들 반 이상이 다 이북으로 납치되고 가르칠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총장이 국방부에 공문을 내서 동국대 교수로 들어갔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그 분들은 모두 육사에 같이 계신 분들이었구요?

그 분들은 소령, 중령까지 진급했고 난 일찍 제대해 대위로 끝났어요. 몇달 더 있었으면 소령인데...

52년 몇 월부터..?

55년 10월 육사 11기가 졸업한 직후에 제대했어요.

영어, 신기하지 않아요?

영문학은 어떻게 배우셨어요? 그 당시에는 영어에 대해서 관심도 없었을 때 아닙니까?

아니지요. 사범학교 시절에도 같이 영어 공부하던 친구들이 있었어요. 근로봉사 가서도 영어단어 외우고 그랬죠. 사범학교 2학년 때 영어과목이 폐강되었지만.

어떻게 영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습니까?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영어, 신기하지 않아요? 하하하

그럼 육사에서도 영어교관을 하신 겁니까?

그렇지요. 내가 영문과 나왔으니까.

그럼 연극하고 희곡하고는 어떻게...?

본래 연극을 좋아했어요.

그 때는 연극다운 연극도 없었을 텐데요.

빵을 줘 교회 가다보니 연극이 취미가 되고

내가 자라던 평양에 기독교가 제일 먼저 들어왔어요. 내가 있었던 곳이 기독교인이 제일 많았고 기독교 계통의 학교가 전부 그 족에 있었지요. 그 때 교회에서 1년에 2~3번 정도 성극을 했어요. 그 때는 그게 그렇게 좋아 구경하러 다녔지요. 사실 연극도 좋지만, 연극보다는 가난하니까 가면 꼭 공책하고 연필하고 빵을 줘서 자꾸 가다보니까 취미가 된 거지.

 대학에서는 소설을 가르쳤어요. 동국대학 총장서리를 한 김정근 교수, 시인 신경림씨, 오국근 교수 등이 모두 나한테 소설을 배웠지요. 그런데 그것도 하다보니까 재미가 없어졌어요. 연극을 하고싶은데... 책은 많이 봤어요. 주로 희곡같은 걸 많이 읽었지요.

 그러다 56년에 미 대사관에서 전국 교수중에서 미국 보내준다고... 스미스만트 그랜트 장학금이죠. 요즘의 풀부라이트 비슷한 거에요. 창피한 일이지만 거기 시험쳤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시험치러 왔는데, 내가 제일 어렸어요. 영문학 하는 사람 3명을 뽑았지요. 장왕록씨, 송욱씨, 그리고 내가 됐어요. 그래서 미국 가서 희곡공부를 하게 된 거지요.

미국가서 본격적으로 공부하신 겁니까?

1년이 계약인데, 마치고 돌아오니까 미 국무성에서 '있고싶으면 1년정도 더 있어도 된다' 는 편지가 왔어요. 그래서 '학위를 해야 되겠다.' 해서 18과목을 했지요. 영문과 아홉, 드라마과 아홉하고. 창피한 얘기지만 '한국에는 연극학과가 없으니 임시 학생으로 학부 1학년 기초과목을 해야된다' 고 해서 했지요. 2년동안 고생 많이 했습니다.

선생님 그 때 경험이 연극개론 강의로 이어지는 것 아닙니까?

미국에서의 교육은 뭐... 김용수씨도 가 봐서 알거에요. 돌아와 보니까 교과서가 없어서 쓴 것이 [연극개론] 이에요. 30년이 지났는데 1년에 2천부를 찍는 정도이고, 지금 3분의 2 정도 크게 수정하고 있어요. 개정판을 내려고. 일단 은퇴하면 수정작업부터 마무리 해야지요.

선생님께서 미국에서 공부를 하시다가 어떤 교수님 한 분을 만났는데 '희곡을 써 봐라' 해서 그게 계기가 됐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부분을 좀...

정에 약해서 극작가가 된 것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예일대학 나온 극작가 토마스  페터슨 교수였지요. 거기에서는 재미있는 게 대학원 코스에서 세미나 할 때 다른 교수들이 모두 수업에 참가하지요. '버나드 쇼' 라는 세미나 였는데, 그때 나를 가르치시던 교수님들이 들어와서 "네가 한국 돌아가서 희곡문학 강의도 하겠지만 먼저 극작가가 되어야 한다" 하고 자꾸 요청하셔서 거부를 못하고 영어로 하는 그 코스를 택했지요. 수업을 따라가느라 밤에 울기도 했어요. 정에 약해 괜히 택했다는 후회도 했지만... 그 때 쓴 두 작품이 공연되기도 했고...

그럼 극작가로서의 정식 대뷔는 미국에서 하신 건가요?

희곡을 쓸 생각도 없이 갔다가 한국사람의 약점인 정 때문에... 그 분이 매일 집에 데려가 밥먹여주고 관심을 가져주는데 어떻게 '노'할 수가 없더라고요.

결국 선생님 최초의 희곡은 영어로 쓰신거죠?

그렇게 됐지요.

그때 그 작품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내가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이니까 첫 작품은 38선 얘기, 두번째 작품은 피난민들이 다리 밑에서 생활하던 것 등, 어차피 쓸 거 '내 조국에 대해서 좀 알라' 고 그렇게 썼지요.

그 극장이 채플힐 (Chapel Hill)에서도 유명한 극장이었다면서요?

'캐롤라이나 플레이 메이커 (Carolina Playmaker)' 라고 거기에서 제일 유명한 곳이지요. 거기 사람들 한테는 등용문일지 몰라도 전 외국인으로 참 운이 좋았죠.

그럼 우리말로 된 희곡은 언제 처음 쓰셨습니까?

돌아와서 59년에 [원고지]라는 것을 서서, 여석기 선생이 사상계 편집위원으로 계실 때 사상계에 처음 작품을 냈지요.

그 당시 59년에 처음 희곡을 쓰실 때 우리나라 연극계에서 희곡 쓰시는 분이 몇 분이나 계셨습니까?

유치진씨하고 오영진씨 등이 계셨지요. 오영진씨는 주로 영화 시나리오를 많이 쓰셨어요. 차범석씨가 먼저 나왔지만 만난 적이 없고 그 분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요.

'섰다' 하다가 결혼으로

선생님께서 그 때쯤에 결혼을 하셔서 사모님을 여기에 두시고 혼자 미국에 가셨다고 하는데 그 과정은 어떻게 된 거지요?

결혼하고 1년 7개월 후 첫 아이인 유리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7개월 될 때 떠나서는 4살 때 돌아왔어요.

결혼은 어떻게 하신거에요?

내가 육군 대위 때 우연히 육사동료 친구네 집에 가서 '섰다' 하다가 만났아요.

어떻게 섰다판에서 만나셨어요?

그 대목을 좀 그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

육사 친구들이 모이면 돈이 없으니까 그저 바둑알 놓고 하지요. 여자들도 같이 하는데 한 여자가 밤낮 속고는 했어요. 뭐 저런 사람이 있나 하다가 그렇게 된 거지요.

그럼 결국은 연애하신 겁니까?

글쎄. 알다시피 내 성격에 여자를 데리고 숨어서 다니지 못하잖아요.

막연히 중매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하여튼 결혼해서 미국갔다 와 보니 애가 4살이었지. 또 이리저리 외국나갔다 돌아와 보면 애가 도 하나 있지. 그러나 66년인가 록펠러 3세 재단에서 부부동반으로 세계연극계를 돌아보고 오라고 했어요. 얾나 좋아요. 그런데 떠나기 직전에 우리 처가 못 가겠대요. 아기를 자겼다구요. 나 혼자 다녀와 보니까 도 하나가 누워있어요. 그게 바로 유정이에요.

[원고지]의 인생 : 동국대 교수이자 번역가

59년에 돌아오셔서 희곡만 쓰셨습니까?

미국에서 돌아와서는 희곡보다 번역을 많이 했지요. 그 때 봉급이 2만원인가 했어요. 그것가지고는 못살았어요. 그래서 번역을 하게 되었지요. 아마 내가 번역을 제일 많이 했을거에요. 한장에 50환 짜리 번역도 하고. 살아야되니까...

선생님의 첫 한극작품인 [원고지] 가 선생님 을생을 시사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돌아와 보니 참 막연하더군요. 중앙대에서 봉급을 2만 9천원 받았는데, 서강대에서 오라고 해서 왔더니 3배를 줘요. 맥주값을 더 벌긴 했지만 그때 교수들 생활이 형편없었어요. 그래서 비행기 타고 돌아오면서 생각했는데, 돈 버는 방밥은 글 쓰는 것 밖에 없더라구요. 그래서 비행기 안에서 '앞으로 한국 돌아가면 내 팔자가 이렇게 되겠구나' 해서 쓴 것이 [원고지] 지요.

그럼 오시자마자 중앙대로 가신 건가요?

처음에는 동국대에 있었어요. 29살에 학교과장 하다가 무슨 싸움에 말려들어 한꺼번에 쫒겨났어요. 한학기동안 방황하다가 62년경에 중앙대에 갔습니다.

선생님 동국대 영문과에 계실 때 기억나는 제자분은 누구십니까? 중앙대로 옮기셨을 때나...

그 때 교학과장을 하면서 내가 연극영화과를 만들었어요. 나는 영문과에 있으면서. 그런데 막상 만들고 보니까 가르칠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유치진 선생을 찾아가 그분한테 맡기고... 지금 KBS에 국장으로 있는 하강일, 김기일, 이일웅, 김홍우, 장욱재씨 등이 당시 연극학과에 입학했죠.

드라마센터 설립과 관련된 일들

아까 록펠러 재단 얘기가 나왔는데요, 여기서 잠깐 언급해주시죠> 드라마센터 건립과 관련하여...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가장 부러운게 상설극장이 있어 거기서 훈련하고 기획하고 공연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59년에 알지도 못하면서 록펠러 재단에 편지를 썼지요. 부럽다고. 그게 어떻게 연락이 되었어요. 그때 이후 록펠러 3세 디렉터가 느닷없이 전화로 '내가 한국 가면 누구를 만나야 하나요?'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만난 적은 없지만 유치진 선생밖에는 없을 것 같아서 급히 유선생한테 연락을 했지요. 나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가면 잘 대우해 달라구요. 유선생은 놀래가지고 그 사람이 공항에 내릴 때 배우들을 다 데리고 가서 꽃다발 들고 환영했대요. 그래서 일이 시작된 거에요. 돌아와서 유선생과 드라마 센터를 만들었는데 내 뜻하고 다르게 되더라구요. 처음에는 공공소유였는데, 1년동안 왔다갔다 하다 보니까 어느새 개인 소유가 되어있더라구요. 그래서 얘기가 많았지.

그것을 밝히실 생각이 있으세요? 논란이 많이 있었는데,,,

아니, 밝힐 것도 없고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어요. 2년 전인가 신문에도 그 일이 나기도 했구요.

엄밀히 얘기해서 드라마센터는 록펠러 센터에서 한국연극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군요.

글쎄, 그런데 지금 보니까 거의 개인 것으로 되어버렸더군요.

그래도 그 당시에 드라마 센터는 한국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극장구조였죠?

그래요. 나도 노량진에서 살다가 일부러 드라마센터 밑에 셋방을 얻어 옮겨 살면서까지 열심히 했었지요.

중앙대에 계실 때 얘기좀 해주시지요.

​'인생을 망치게 한' 선생 : 중앙대 시절

62년 부터 69년 6월 까지 연극영화과에 있었지요. 중앙대 시절은 권성덕씨가 더 잘 알거에요.

저는 선생님을 직접 뵙기 보다는... 아까 호구지책으로 번역했다고 하셨는데, 번역하신 책으로 먼저 뵈었습니다. 그 당시 학생들은 가난하고 희망도 없고 그리고 어학실력도 없었죠. 그럴 때 선생님께서 소개해 주신 것이 유진 오닐의 단막극입니다, 문고판으로 조그맣게 나온건데, 그것들을 읽고서는 꿈에 부풀었었죠. [고래]라든가, [카리비도의 달밤], [위험지역], [밧줄] 등 몇 개가 들어있었죠. '아 이렇게 좋은 작품도 있구나' 하면서 참 좋아했어요. 그러다가 실제로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된 거에요. 지금 생각해봐도 그 당시 제자들이 선생님을 많이 따랐던 것 같아요.

나 때문에 일생 버렸다면서? (웃음) 연극은 안하려고 했는데...

지금 선생님 제자들이 동국대에도 있고 서강대, 중앙대, 각 방송국, 배우, PD,연출 등 많지만, 제가 여기에 왜 이렇게 뽑혔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느날 막연히 잔디밭에 앉아 있는데 누가 툭하고 엉덩이를 찾요. 이렇게 보니까 키가 크신 선생님이 "너 같은 놈이 배우 하는거야. 배우하라우" 하시더라구요. 배우를 해여될 지 뭘 해야 될지 , 영화를 해야될지 영화를 해야될지... 여하튼 원서 쓸 때는 연극영화과 들어가면 여러가지 많이 할 것 같았어요. 나만 부지런히 열심히 하면 여러가지 해볼 수 있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선생님이 왜 저런 말씀을 하실까? 그 말씀 때문에 '나 같은 촌놈도 배우를 하면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모여서는 작품을 하나씩 맡아서 하기 시작했어요. 결국 그 작은 일이 제가 배우되는 계기가 되었지요.

거기에 권선생님 말고도 몇분 계시잖아요. 그 때는 선생님께서 일생을 망쳐놓은, 그러나 이제와서 보니 성공한 분들이요.

사실 그 당시에는 연극하는 사람들 중에 대학출신이 드물었어요. 중앙대에서 처음으로 학사 배우들이 나왔지요. 그래서 그들을 중심으로 극단을 만들었는데 만들어 놓고 보니 유일한 학사 극단이 되었어요.

[실험극단]을 도왔고, 65년에 [가교]를 만든 것도 선생님의 힘이었죠. 그 때는 밥만 먹어도 고마웠고, 조그만 극장에서도 공연하고. 또 새마을 운동을 하기도 했었죠. 자연퇴비를 만들어 뿌리면 좋다고 해서 한달을 돌고. 전라도 지리산과 부산으로 해서..

[가교]에 식구들이 많은데 어떻게 할까 고민했어요. 출발은 했는데 아마추어가 하니까 그럴 수 밖에. [민중극단]은 63년에 만들어졌죠. 우리끼리 신선한 코미디를 해보자 하고 만들었는데 2년 하다가 대표를 그만 두었지.

권 선생님이2기이고, 최주봉씨 등이 5기이지요? 최상식 선생님이 4기나 5기 정도 될 것 같아요.

방송국에 가보면 지금 서강대가 다 잡고 있어요. (웃음)

물 만난 '광적인' 학생들 : 서강대 시절

서강대로 와서는 지금의 신문 방송학과를 만들게 되었죠. 초기에 '보도예술학과' 였는데. 가톨릭은 혁명지향적이어서 정권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신문방송학과' 로 고치라고 해서 고친 것이 De-partmant of Communication Arts였죠.

원래 과 이름이 바뀌게 된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보도예술' 에서 '신문방송' 으로.

문교부에서 지시를 한 것이지요. 안 그러면 없애겠다고 그러더군요.

문교부 정책상...

유사과 통폐합이 있었지요.

서강대에서는 약속대로 극장을 지어주었는데, 이름을 [대학극장] 으로 하자고 했더니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신성한 학교에 극장이 뭐냐' 고 해서 결국 [메리 홀]로 됐어요.

외국 갔다 온 선생님들이 극장이라는 말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이상하다네요. 미국에는 학교 내에 다 극장이 있는 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어로 써야 된다는 거지요.(웃음)

당시만 해도 '극장' 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지금과는 달랐겠지요.

지금도 학교 책자를 보면 '강당' 이라는 말과 섞여 나오거든요. 강당이라는 것은 극장보다 하위수준인데 아직 구분이 잘 안되어 있는 것 같아요.

68학번이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1기생이죠. 73년에는 '신문방송학과' 였는데 신문은 거의 가르치는 것이 없다싶이 했어요. 저는 72학번입니다. 신문방송학과라고 들어왔는데 신문과 방송에 대해 가르치는 것 같지도 않고, 이선생님은 세익스피어를 많이 가르치셨어요. 그래도 선생님 제자들 중에서 저는 연극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 중 한 명이었죠.

당시 신문사에 들어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다 방송국가고, 김철리나 몇 명이 연극했지. 최용원씨가 동아 일보에 들어갔을 때는 자기 힘으로 들어갔어요. 그 때는 신문 강의가 거의 없었어요.

제가 1학년 때 극장에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공연했었어요. 신입생으로 들어와 그 해 봄 축제 때 보았는데 새로운 세계의 개안이었지요. 71학번과 70학번이 배우였는데 그 선배들은 나의 우상이 되었어요. 2학년이 되어 선생님 강의도 듣고 해서 연극에 대한 싹이 텃지요. 그 김에 연극을 하려고 했는데 사투리 때문에 끼워주지를 앉는 거에요. 저희 72학번은 30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여학생이 16명, 남학생이 14명이었죠. 남학생 14명 중에서 10명 정도가 지방학생이었고, 그 중에서도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6~7명 정도였어요. 그 사람들이 아웃사이더가 되어버린 것이죠. 그런 사정이 저희 학번에서 연극에 별로 손을 못 대고, 방송국 PD가 있기는 하지만, 주로 신문쪽으로 많이 풀려나오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지요.

저도 신방과 타이틀 보고 들어왔는데, 제 시험감독이 선생님이셨어요. 지금도 그 때와 별 차이가 없어요. 그때도 노숙하셨고. 시험 칠 때 마음이 매우 푸근했어요. 그 인상이 지금까지도 연결되고 있지요. 수업에 들어가면 부담을 주시지 않잖아요. 우리 졸업생들이 모여서 어쩌다 연극 얘기를 하다보면, 한번 씩은 다 연극을 했다고 해요.

연극 열풍의 시대가 한참일 때 다른 분야가 시선을 글기 시작했는데, 신문방송이 이 사회에서 서서히 부각되었죠. 그래서 끼가 있는 사람들이 주로 연극을 했고, 일반 대학생들은 취직위주로 공부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연극이 필수 과목이었죠?

선택이었어.

점차 광적인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연극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웃음) 저는 75학번인데요, 제가 학교에 들어왔을 때 보니까 연극반은 남녀가 어울려서 밤 새워 술 마시고 했지요. 그래서 조금은 퇴폐적, 또는 개방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아직도 그 이미지가 남아 있어요. 용수형, 정한용 선배, 김철리씨 등 모두 삶의 이미지가 천방지축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상적으로 사회생활했던 사람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지. 그것이 바로 이 선생님의 옛날 명동 시절의 모습이잖아.

가르치지 않고 '끄집어 내주시는' 선생님

선생님의 아류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했군요. 권성덕 단장님도 말씀이 계셨지만 KBS와 동아일보는 서강대 신방과들이 꽉 잡았다고 하죠. MBC의 괴물인 장수봉 선배라든지 보면 역시 연극을 바탕으로 준비를 했기 때문에 나중에 큰 역량을 발휘하는 것 같아요. 다른 학교 출신들과 비교할 때 서강대 신방과는 두 분야에서 강세인데, 연극과 상관되는 PD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광고지요. 광고중에서도 카피가 강합니다. 선생님의 영향으로 학교 다닐 때부터 천방지축으로 사고가 가능했고, 그런 영향이 오늘날까지 이어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이 신방과의 풍이나 분위기로 큰 줄기를 형성해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서강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떤 면에서는 창의적인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성각대 출신 중에는 다른 학교에 비해 소설이나 시 등을 하는 사람이 적은데, 신방과 출신의 경우는 창작하는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지요. 이는 이선생님의 [창작법] 시간을 통해서 길러진 사람들이 극작이나 창작에 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쪽으로 진출하면서 형성된 줄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창작을 할 수 있는 과가 국문과, 영문과들인데, 그 과들은 '끼' 보다는 '학자충'의 선생님들이 많았고 그런 분위기가 과를 지배했던 것 같아요. 국문과에서는 '신방과는 학문이 아니다' 라고 했어요. 대표적인 분이 김열규 선생님이셨죠. '신방과가 전공인 사람들은 손 들라' 고 해서 들면 "너희들은 나가라. 여기는 학문하는데지 딴따라가 들어오는 곳이 아니다." 하고 말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실질적으로 딴따라의 대부로서 이선생님이 계신 신방과가, '서강고등학교'라는 교풍과는 전혀 별개의 세계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성실씨가 내 강의를 많이 들은 것 같은데.

예, 다 들었어요.

최성실씨는 지금 최고의 TV작가가 되어있지요.

이근삼 선생님은 저에게 서강대에서 가장 중요한 분중 한 분이십니다. 이 선생님을 생각할 때 '학자'보다는 '자유인'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라요. 이선생님은 뭘 주입해서 가르치기 보다는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을 끌어내 주시는 게 가장 커다란 힘이었어요. '네가 써봐라'는 거였죠. 제가 레포트 낸 것에 대해 평해주신 것이 가장 감명깊었어요. 사람을 어떤 틀 속에 넣어서 자꾸 다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있는 잠재력을 그대로 커나가게 하는 것, 거기에다 자신감을 주시고 그 자신감을 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것. 사실 저는 이근삼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는 글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어요. 결국 연극은 안했지만 생긴 그대로 사랑해 주시고 생긴 그대로 키우도록 가르쳐 주신 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길을 잘 들었다고 생각해요?

전 참 소중해요.

저도 글 쓰는 직업을 갖게 되었는데, 사실 저는 선생님의 [창작법] 과목을 싫어하는 학생중에 하나였어요. 특히 레포트 내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어요. 그래서 우리 동기 중에서 지금은 기자,PD,광고계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당시 모두 모여 모자이크로 베껴서 작품을 내곤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적당히 안 읽고 서로 베껴서 내곤 했지요. 그것이나마 열심히 했기 때문에 지금 기자하는데 도움이 많이 돼요.

최성실씨가 말씀을 잘 하셨는데, '내가 모르는 것을 끄집어내주시는 것' 은 저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명교수 명강의] 코너를 신문인가 방송에서 보도한 적이 있으셨지요?

동아일보에서 한 적이 있었지.

손인수라는 친구가 했지.

경향신문에서 전화가 왔는데, [명교수 명강의]를 한다며 서강 학보사 총학생회에서 조사를 했는가봐. 나를 소개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더군요. 난 한번 써 먹었으니 하지 말라고 그랬오. 동아일보에서 3,4년 전에 해먹은 것을 왜 하냐고.

신문은 하루장사여서 3,4년이면 어마어마한 세월인데요, 뭐. 배구 얘기를 좀 해주시지요.

배구 선수들에게 국어, 영어도 가르치고

당시 배구단을 만든 것이 여기 최용원씨지요. 이 학교에 와보니 운동부가 없어요. 배구 얘기가 나왔고, 최용원씨가 당시 인창고등학교 출신선수들을 데리고 왔어요. 운동하는 애들이 공부를 안해서 애들을 공 부시켜야 겠다'고 생각하고 숙소에 데려다 놓고 국 어, 영어를 가르치곤 했죠. 당시 선수아이들도 고생 을 많이했지요. 내가 학생처장을 그만두니까 배구 부의 지원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내가 얼마 보태고, 코치였던 이용관씨도 상당한 액수를 보탰지요. 그러나 역부족이라 배부도 해체되고 말았죠.

‘공부만 시킨다'는 이슈가 제기되는 문제와, '학교의 구심점이 없다'는 이슈가 지 었던 때입니다. 5공화국 들어서면서 급격히 이 늘어난 시기였을 겁니다.정원 500명 시대를 마가 고 한 학기에 천 몇 백 명이 들어오면서 서강대기 양적으로 커진 시점에서 구심점을 마련하기 힘들어 던 게 사실이예요. 연고전같은 구심점을 마련하기 위해서 운동부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사천에. 온 서강 동문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듯한 인상이 강했는데 이것을 묶어야겠다는 생각에 선생님이 걱정을 하셨고, 그런 계기에서 배구부를 만드는 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요. 배구부가 생기자 서강대가 '공부하는 학교'였다는 데서 체육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데 반해, 배구가 해체된 것이 선생님께서 제일 아파하셨던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당시 교수들도 많이 후원했지요. 대학원생들도 고생이 많았어요. 지방에 게임이 있으면 자기 돈 내고 내려가서 응원하고 음료수 사 주고, 결국 지금 고대나 연대를 보더라도 운동부는 동창회 소관이 예요. 당시는 서울대를 불러서 게임을많이 했죠. 열등감을 없애자고.

당시 서울대와 교환경기를 했는데, 그 팀이 여기와서 우리 체육관에서 하기도 했고 우리도 가곤 했지요.

우리 배구부가 없어지니까 서울대도 없어졌지요.

그 때 어려웠던 것은 인창고 애들을 불러올 때 2%만 원을 주고 데려왔는데, 그 당시 좋은 선수 한명을 데리고 오려면 5천만원은 했었어요.

80년대 초지요. 최선배는 어떻게 관여하셨어요.

그 당시 저는 배구 담당기자였습니다.

말이 그렇지. 최용원씨가 배구부를 만들었지. 난 그 저 배구를 좋아했어.고등학교 때 배구선수도 했고. 지금도 배구는 좋아해요. 배구 대표 선수들 데리고미국, 캐나다도 일주했었고, 얼마나 좋아요.

그 당시 선생님은 대학배구연맹 이사로 계시면서 국가대표 남자팀을 인솔하고 미국, 캐나다 원정에 단장으로 가셨어요. 아마 선생님 인생에 있어 유일한 외도가 아니었나 생각해 보는 데요.

저는 83년에 대학원에 들어왔는데 그 당시 사회과학 일변도의 분위기에서 답답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대학원생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다른 길을 모색하기도 했는데, 선생님께서 용기를 주셔서 결국은 박사 학위까지 따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뭔가 모르게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것이 있었어요. 그때를 생각해보면 저는 과학의 틀 속에 모든 것을 담지 못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는데, 이런 사람에게도 나름대로의 길이 있다는 충고를 게속해 주셨어요. 혹시 선생님 께서는 학생들을 키우는 데 어떤 철학이나 의도가 있으신지요? 저도 눈여겨 보면서 배우고 싶습니다.

김용호씨가 들어왔을 때, 아직 ‘문화’에 대해 체계적인 정리가 안되어 있을 때였죠. 신문과 방송을 가르치는 것을 보니 단순한 기술을 가르치 는 것 같았어요.하지만 이보다는 문화를 보는 것이 훨씬 중요한 다고 생각하여 문화에 관련된 수업을 시작했죠. 20년 지나고 보니 신문이나 방송도 역시 문화란 테두리 안에서 보는시각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그리고 그것이 내 신조구요.

선생님께서 떠나시면 지금까지 신문방송학과가 가져온 학풍에 또 하나의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데, 사회과학 일변도의 학과로 변질될 우려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강현두 선생을 요전에 만났더니 그런 얘기를 합디다. 선생님이 은퇴하면 문화 관계 강의가 없어지지 않겠는가고.

꼭 그렇다고 볼 수 없는 게, 선생님께서 미래를 내다보는 식견이 있으신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 선생님이 한국 신문방송학과 최초로 대학원에서 문화와 예술을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희는 그것이 뭔지도 잘 모르고 배웠어요. 시대를 거슬러 서 보니까 10년 후 쯤이 된 지금에야 신문방송학계 통에서 문화 바람이 불었어요. 지금은 오히려 사람 들이 ‘문화’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갖고 있고,이쪽을 알지 못하면 신문방송학을 얘기할 수 없는데까 지 왔지요. 그런 전통 때문에 저희도 많은 사람들이 전공으로 문화 공부를 하게 되었고, 대학원생들도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강 한 게 서울대와 서강대인데, 서울대보다는 오히더 우리가 먼저 문화를 연구해 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선생님이 은퇴하신다 해도, 연극부분에서는 용수형같은 제자들도 있고, 신방학 일반에서는 문화 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게다. 가 만약 단과대학으로 발전하게 된다면 외국의 예처 럼 연극과, 영화과, 신문과, 방송과......이런 식으 로 커다란 장래 비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 께서 뿌리신 문화 공부의 공간은 이후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게 문화가 기초인데, 잘못하면 기술적으로 흐를수도 있다는 우려가 듭니다.

잘 보면 서강대 신방과 출신의 학생들이 창조적인 일에 상당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결국 앞으 로의 사회는 문화의 사회라는 것을 지금 우리 모두 가느끼죠. 80년대 초 부상하기 시작했던 문화가 지 금은 전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영역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경쟁력, 경쟁력 하지만 그것보다는 문화 가 더 중요하죠.미국이나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선 진국이 문화원을 통해 우리 사회에 자기들의 뿌리를 내려 공기처럼 번져나가도록 해놓고, 물건은 그 다 음으로 장사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문화가 더 중요 성을 가집니다. 모든 판단의 기준으로서, 학문의 뿌리로서 문화를 첫째로 봐야 합니다.

두번째는 미래의 사회는 개인적 창조성이 없으면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는 사회입니다. 일본이 여러 분야에서 미국에 추월당하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의 교육제도가 공동체 중심이라면, 미국은 개인 사고의 창조력을 발전시키고 자기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간을 양성해 왔습니다. 이런점에서 볼 때 서강대 신방과는 '혼자서 스스로 생각하고 사고하게하는 교육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이제까지 우리의 교육제도가 놓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교육이지 않습니까? 여기 에는 선생님의 역할이 매우 크지 않았는가 하는 각이 들지요.

'이근삼의 아류'를 넘어서 새로운 방식 으로 이끌어 나가면, 이선생님의 교육방식이 100년 후에 더 높이 평가받을 수 있을 거예요.

21세기를 위한 교육을 미리 하신 거지요.

김호석군도 한마디 해요. 

80년대 후반에 선생님을 처음 뵈었는데, 저희 아버님보다 연세가 더 드셨고 사회적 지위도 완성되신분을 뵈었기 때문에, 너무 차이가 나서 제자면서도 참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조교생활 하면서 본 선생님은 자유로우시면서도 예의 범절에서도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마광수식 예술 정신만 추구하다 보면 아내도 계속 교체해도 좋다는 식일 수 있지만, 선생님의 도덕관은 매우 철저하다고 생각해요. 술좌석에 서는 저와 차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으로 같이 술을 들자고 하십니다. 어떤 경우가 있었나 하면, 보사부장관과의 식사 자리도 마다하고 저희들과 술을 들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점은 아무도 따라 수 없는 선생님만의 힘이죠. 제자들을 계속 새롭게 봐주시는 게 대단한 힘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선생님에 관한 얘기에서는 술이 빠지질 않습니다. 혹시 술 철학, 혹은 술 친구 철학이 있다면...

사실 나는 술을 늦게 배웠고, 담배는 더 늦게 배웠어요. 나는 술 자체는 모르겠는데, 술이란 대화를 원활하게 하는 촉진제라 생각해요. 술좌석에서 무슨 술 좋아한다든가 술 한잔 마시고 참 맛있다고들 하 는 데 나는 아직도 술맛을 잘 몰라요. 다만 술은 얘 기하는 데 촉진제라는 정도로만 알지요. 담배도 마찬가지구요. 그 증거로 여태껏 집에 들어가 혼자 반 주라고는 한 적이 없고, 담배도 안 피워요. 해서 술이라는 것은 의사 전달의 윤활유라고 생각하지요.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 이것이 없으면 섭섭하지 않겠어요? 나는 술을 그렇게 배웠습니다. 대화를 하려면 양쪽이 무장 해제해야 하는데, 여기에 술이 좋다고 생각해요. 작품을 쓰는 데도 자기 자신을 무장해제 해야 작품이 나옵니다. 나는 애주가는 아니예요. 여기 계신 권성덕씨는 술이라면 맥주가 아니면 상대를 안 하는데, 나는 맥주건 소주건 다 좋아요. 술 자체 에 철학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마시는 것이니까.

 

 선생님의 주례 학도 유명하잖아요. 주례 때 제 친구들, 철리나 저, 다 야단 맞았거든요.

최용원씨 결혼 때도 그랬지. 부인이 김경희지. '내가 알기에 신랑은 공부 안한다. 졸업할 때 학점이 2.1 이 뭔가 말야' 하면서 욕도 하고 그랬지. 동아일보의 지영선 차장이 동아일보에 글을 썼는데, '이건 주례가 아니고 제자 놓고 욕하고 훈계하는 것 같다'고 하면서도 감동을 받았다고 했어요. 대학원생 하나가 논문이 내일 마감인데 그것도 안하고 장가간다고 해서 식장단상에서 '너 논문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얘기를 한 적도 있어요. 제일 중요한 건 당사자에게 얘기하는 건데, 보통 주례라면 '만장하신 관객들을 위해서 하거든. 난 그건 반대야. 솔직히 말하면 난주례를 못하거든.

아니예요. 제 결혼식 때도 선생님 주례에 대해서 반응이 매우 좋았어요.그렇게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 적이 없대요. 왜냐하면 결혼식장에 와서 선생님이 제 단점을 몇 가지 말씀해 주셨거든요.

아니,그랬나?

처가집에서도 나에 대해서 매우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게 돼서 참 좋았다고 하더군요. 선생님하고 술 먹다 졸던 얘기 등 몇 가지 말씀하셨잖아요.

'절대로 술 먹는 자리에서 자지 말라'고 그랬지.(웃음)

선생님 주례마다 중요한 말씀을 하셨어요. 기억나는 것이 뭐냐하면 '남편이 아침에 식사할 때 여자는 일체 잔소리를 하지 말라. 그런데 제 와이프가 잘 안 지키거든요. '남자 친구 찾아올 때 어느 시간이든 간에 인상 쓰지 마라. 사실 그런 얘기가 실질적이거든 요. 신부한테도 그런 얘기 한 것이 기억에 남죠. 다른 주례는 그런 얘기 없잖아요. 대개 신랑, 신부만 이상화시키는데......

이제 선생님과 나눌 얘기의 큰 대목은 웬만큼 된 것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마지막 말씀하시기 전에, 선 생님께 반쯤은 축하, 반쯤은 희망의 말씀을 한 마디 씩 해 주시지요.

퇴임하신다니까 한편으로는 섭섭하지만, 이번에 「이성계의 부동산과 관련시켜 보면, 주인공을 맡으신 김동원 선생은 무대를 은퇴하시는 분이고, 또 선생님은 정년...... 두 예술회원들의 만남과 헤어짐이 어떻게 보일까 하는 데 저는 관심이 가구요. - 그 동안 한국 연극은 리얼리즘 계열의 비극적인 것이 아니면 연극의 질이 떨어지는 것처럼 고정관념 화 되었는데, 선생님이 희극작품을 쓰시고 민중극단 도 하시면서 '희극도 훌륭한 연극'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고, 연극계의 쌍벽을 이루어 놓으셨죠. 앞으로 시간이 더 나실 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하셨던 것 처럼 사회를 풍자한다고 할까, 좋은 작품을 더 많이 써 주시면 한국 연극계가 더욱 활발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글 많이 쓰실꺼죠? 희극 많이 쓰시고 싶으세요?

살다 보면 이것도 쓰고 저것도 쓰고...

상관없이 쓰신다는 거죠. 그러나 희극이 쓰고 싶을 때가 있고 비극이 쓰고 싶을 때가 있어요. 이근삼 : 희극이라는 장르를 따로 생각하고 비극을 따로 생각하는데, 비극과 희극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거라고 봐요. 인생이 동전인데 한쪽만 자꾸 봐요. 사람이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양쪽을 보는 것이죠. 보통은 항상 좋은일만 보고 사는데,느닷없이 상(喪) 같은 것을 당하거든. 그럴 땐 뭐가 되느냐 말이야. 인생은 희극과 비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다 혼합되 어 있어요. 써머셋모옴이 한 얘기인데, ‘항상 좋은 것, 밝은 것만 찾다가는 안된다'는 거죠. 완전한 집안이 어디 있어. 모두 말 못할 고민이 있지. 나도 제 일 충격적인 일을 당해 보았지만, 그럴 때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는가가 문제지. 극작도 마찬가지지요. 나는 희극 속에 비극이 들어 있고, 비극 속에 희극 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희곡을 쓸 때 비 극 쓴다, 희극 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자유롭게 글 많이 써 주세요.

은퇴해서 연금 받으면 수입이 반으로 뚝 떨어지니까 글은 써야 하는데 희곡 쓰면 안 될 것 같고... 내 가 방송 드라마를 쓰면 어떨까? 최성실씨가 MBC의 연속극 양보하고 나 좀 도와주지.

[원고지] 쓰던 그 당시로 돌아가시는 거예요?

최성실씨의 TV 연속극 첫회를 보고 내가 전화도 했는데...... 최성실씨가열심히 쓰지. 「우리들의 천국」을 쓰는데, 이 사람이 한 번 학교에 왔어요. 왜 왔느냐고 하니까 조옥라 선생 강의를 들으러 왔다고 했어. 글 쓰는 데 필요하다는 거예요. 이 정도로 성실해야 하는 거야. 실망한 것이 하나 있다면, 드라마 에서 심리학 교수로 박인환씨가 나왔는데 누구나 리 었더니, 최성실씨 왈 그게 바로 나라는거야. 그래도 박인환씨보다는 내가 낫지.(웃음) 열심히 써 주기 바래요.

저는 선생님 살아계실 때의 평가와 돌아가신 후의 평가가 어떠할까가 매우 궁금해요. 제 느낌으로는 이순신과 원균처럼, 어떤 사람은 장점이 크게 부각 되고 원균처럼 나쁜 점이 부각되는 인물이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순신 같이 후대에 더욱 평가받는 인물로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호석이가 선생님 사후까지 말했는데, 선생님의 은퇴는 다른 분 들과는 다르게 해방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건상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는. 우리 제자들은 선생님이 은퇴한 후에 많은 것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은퇴를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성실씨도 그렇지만 작가로서 라이벌 의식이 들고, 매우 두려워하고 있잖아요.(웃음)

TV 드라마 쓰지 마시고 희곡 쓰세요. 두려우니까요.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게, 선생님께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신방과 하고 잘 안 맞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예요. 오히려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학과에 있으셨다면 선생님의 작품은 훨씬 좋은 것이 되 었고,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선생님보다 훨씬 큰 인물이 되지 않으셨을까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저희가 신방과에 들어와서 배우는 것들이 어떤 의미에 서 ‘각이 진’ 학문이고, 사회과학이라는 틀 속에 기초로부터 고급과정까지 따라가는 학문이었기 때문 이죠. 게다가 선생님께서 처음 계획했던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틀 지우는 쪽으로 학과가 움직여 갔죠. 그래서 선생님의 정년은 곧 해방이고, 곧 독수리 가 날듯이 창공을 나시는 것이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아까 용수형이 말했듯이 '해방' 이라는 말이 적 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저도 몇 번 말씀드렸지만 은퇴하는 것이 선생님께서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는 계기가 아닐까 합니다. 과목에 맞추어 강의를 해야 하는 등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서 정말로 좋은 작품이 나오기를 개인적으로 소망합니다.

저도 의무방어전을 해야겠는데......(웃음)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혜택을 받기보다는 욕먹고 꾸중 받는 쪽으로 일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술자리 있으면서 뒤통수 맞고, 제 집사람 이 74학번인데, 지금도 그 주례가 저희 회사 기자들 뿐 아니라 다른 기자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어요. 한겨레신문 문화부장 하는 지영선씨가 지금도 그 주례사를 두고 얘기하는데, 선생님께서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마자 “왜 이들이 결혼하는지 잘 모르겠 다한 애는 도서관만 다니며 공부만 하는 애고, 한 놈은 맨날 술만 마시고 당구장만 돌던 애인데, 얘들 이 어떻게 결혼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셨지요. 그 간에 나는 결혼 잘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꼭 10년 하고 한 달 반 전 애기죠. 이것이 선생님이 가진 파격미라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기에 선생님은 천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춘천재라고는 생각합니다. 틀 속에 안주하 지 못하는 인격체라는 점에서 선생님은 춘천재시고, 그 점에서 보통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호구지책 때문에 한 틀에 너무 오랫동안 계셨던 것 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문제를 훨훨 날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주례집을 모으면 상당히 팔리지 않겠습니까?

우리 학생들처럼 나를 생각하는 학생들을 못 본 것 같아요. 아들이 죽었을 때 절에 가서 뼈가루를 다 뿌리고 돌아오는데, 그 때 최용원씨가 끝까지 제 옆에 있어 주었죠. 생각해 보니 애가 죽을 때까지 칭찬을 못했단 말이야. 그 애 방에서 내가 잔다고 하니 최용원씨가 죽어도 집에 안 가겠다며 나랑 같이 잤어요. 나 혼자 자면 울거라고 그러면서. 그런 제자들이었어요. 그리고 창조적인 과에 갔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라고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느끼진 않았습니다. 서강대 우리과처럼 창조적인 만남이 어디 있었어.

이제 거의 끝날 때가 되었습니다. 선생님 뒷바라지도 하셨고, 그 때문에 저희 제자들이 고생도 많이 시켜드렸는데, 그 동안 사모님께서 저희 치닥거리를 하시느라 고생이 참으로 많으셨습니다. 사모님께 특별히 감사 말씀드리구요.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한 말씀해 주시지요.

내가 평상시에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말을 했던 것 같아요. 글쎄,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연극계에서 옛날에 내가 가르쳤던 사람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후일에도 그렇게 후학들이 잘하기를 바 랍니다. 또 후학들이 저보다는 공부도 많이 했을테니 훌륭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 이 모두 잘 되는 걸 바라지요.

그동안 많은 얘기를 했으니까 딱히 더 말할 것은 많지 않은데...... 기억나는 것은 경남대에 있는 김 종덕씨의 경우 좌우명을 자꾸 써 달라기에 '불급불태(不爲不)'라는말을 써 주었어요. 서둘지 마라. 요새 학생들이 매우 성급한 것 같아요. 태는 태만하지 마라. 서둘지도 말고 태만하지도 말라는 거였죠. 1년 후 김종덕군을 만났더니불급은 그대로 지키는 데 불태는 잘 못지키는 것 같다고 얘기하더군요. 내 가 26세에 대학의 전임이 되었을 때를 보더라도 서두를 필요 없어요. 몇 년 먼저 전임됐다고 좋아할 필요도 없구요. 그저 착실해야지. . 또 양심, 양심 하는데 경험을 통한 양심을 말해야지 경험하지 않고 말하는 양심의 소리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돼요. 살다가 경험을 통해서 보면 을 말 못할 때도 있어요. 경험을 통하지 않은 의 소리는 중요하지 않고 경험을 통한 양심의 소리가 중요합니다. 그렇게 삽시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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