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배경 3.png
작가에 대하여.png

[ 책 소개 ] 

한국 극예술학회에서 펴낸 [극작가 총서] 제 7편 <이근삼>편. 

2010년에 발간된 이 총서는 극작가별 관련 연구 성과를 수집, 정리한 논문들을 수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극작가와 작품을 '읽는' 방법과 관점들을 만나게 하고, 그 만남을 통해 극예술의 세계로 한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 목차 ]

 

연극과 정치현실 / 김문환

현대적인 우화의 세계 / 서연호

이근삼 희곡의 희극성 고찰 / 김성희 

빈정거림의 미학, 인간적인 것에의 갈망 / 양승국

이근삼의 재판극에 관한 소롬 / 김미도

이근삼 희곡의 비극성 연구 / 김호석

이근삼 희곡의 일상성과 근대성 / 박명진

외부자적 시선의 자유로운과 아이러니 / 박영정

이근삼 희곡<원고지> 연구 / 박혜령

이근삼 초기 희극 연구 / 심상교

이근삼 희곡 연구 / 이미원

이근삼 희곡의 놀이성 연구 / 홍창수

 

원고 출처- 이근삼 연보

이근삼 희곡의 비극성 연구

이근삼 희곡의 비극성 연구

김호석
(KBS방송문화연구소연구원)


1. 문제의 제기

2. 비극의 관한 소견

3. 이근삼 희곡의 비극성

4. 결론

1. 문제의 제기

이근삼은 한국의 대표적인 희극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평가는 이미 공식적으로 어느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보편성을 갖는다.  6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근삼의 작품 경향은 전반적으로 희극 취향으로 공인 받은 것이다. 그런데 몇몇평자들이 논하는 바 이근삼의 희극에는 다른 작가들의 희극 작품과는 달리 연극이 끝나면 묘한 감정을 유발한다고 지적한다. 웃고 즐기는 사이 연극은 종극에 이르렀지만, 관객들은 재미 뒤에 숨어 있던 무엇인가모를 안타까움이나 슬픔, 또는 답답함 등을 느낀다는 것이다. 비평가들은 이근삼의 작품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현상을 ‘짙은 페이소스가 담긴 희극’ 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비평가들의 평가는 여기에서 그친다.짙은 페이소스가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왜 그럴까?분명히 결과가 발생했다면 원인을 발본색원하는 것이 비평가들의 소명인데 말이다. 아마도 희극 작가라는 절대적평가가 페이소스가 발생한 원인에 대한 탐구를 저해하고 있는 것 같다.비평가들이 이근삼 작품의 희극성에 집중해 그러한 페이소스가 왜 발생하고 있는 지를 규명할 생각을 못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화 된,또는 화석화 된 이근삼의 작품 세계에 빠져 새로운 방식의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상 밖으로 이근삼에 대한 평가는 쉽게 보이는 현상에 매몰되어 있어 첫 걸음을 내디딘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본 글은 이근삼의 작품에 나타난 페이소스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는 이근삼을 희극 작가로만 평가하는 평단의 일방적 해석에 대한 하나의 도전으로서 비평적 개입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작업으로 이근삼에 대한 평가는 보다 다양해지고 심층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근삼의 작품에 나타난 페이소스의 본질은 무엇인가? 한바탕 껄껄 웃으며 일상의 스트레스를 단번에 날려버리는데 그치지 못하고 한 술 더 떠 관객에게 무엇인가 감정적소구를 일으켜 새로운 스트레스로 인도하는 것일까? 바로 여기 서비극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희극적 형식과 내용에 감추어진 이근삼의 비극 정신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잠정적인 결론을 표명 한다면 이근삼의 작품에 나타난 페이소스의 본질은 삶의 비극성, 특히 인간 소외의 문제와 직결된다. 이 글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면서 이근삼이 표출하고자 한 삶의 비극성을 한 층 부각시킬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글의 서술 방식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먼저 비극에 대한 문제를 간단히 정리하면서 글을 시작 할 것이다. 다소 논란이 있겠지만 비극에 관한 관점을‘비극론의 역사에 나타난 비극관’ 과 ‘작가의 전략적 행위로 서비극적 요소의 도입’ 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다음으로 작품 분석을 통해 이근삼의 작품에 나타난 비극성이 무엇인지를 규명한다. 최초의 본격적인 작품인 〈원고지〉로 부터 말기의 작품인 <이성계의 부동산>까지 이 글의 초점과 관련된 작품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이근삼이 보여주려고 한 일관된 비극성을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분석을 통한 결론으로 이근삼이 현대적인 의미의 비극 작가로 해석될 수 있음을 지적할 것이다.

2. 비극의 관한 소견

61년도 스타이너가 〈비극의 죽음〉을 발표한 이래로 비극의 종말이라는 매우 비극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게다가 현대적인 희곡작품의 경향은 희극과 비극을 구분하기 매우 모호한 상태로 발전하였고, 동시에 양자의 요소를 유기적으로 결합한 뒤로는 순수한 희극과 순수한 비극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극의 죽음은 상당히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영웅이나 고귀한 인간의 실패와 관련된 전통적인 비극 관념을 법칙, 또는 규칙으로 상정할 경우 비극의 죽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리로서 규정할 만하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비극에 대한 사망선고는 과연 쉽게 단정할 수 있는 문제인가? 정말로 비극은 더 이상 쓰여지고 묘사될 수 없는 작품인가? 그 결과, 비극은 이제 단지 회고적인 가치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가? 비극적 현실이 여전히 지구상 이곳저곳에 산재한 상태에서, 가깝게는 우리의 일상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비극이 성립할 수 없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사실상 비극과 비극적 현실에 대한 관념은 서로 다른 것이다. 관념은 언제나 그렇지만 현실 일부분을 추상화하는 데 그친다. 만약 부분적인 추상을 절대적인 보편성으로 상승시킬 때 오류가 발생한다. 관념이 자신보다 무한한 현실을 자신의 좁다란 가치와 억지 논리로 재단하는 것이다. 마치 인간을 침대에 맞춘 프로크루스테스의 잔인한 평가 잣대가 역사의 현실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비극의 죽음 역시 역사적 특수성을 갖는 특별한 비극 관념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법칙으로 상정하는 한에서 논할 수 있다.

3. 이근삼 희곡의 비극성

구체적인 분석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에게 제기되는 질문 중 하나는 “이근삼은 왜 희극 형식을 선호하는가”라는 의문이다. 아마도 작가들은 처음부터 자신을 특정한 형식으로 가두어 두는 전략을 사용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대개의 경우 작가들은 몇 작품을 쓰고 난 후 자신에게 맞는 취향을 알게 되고,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특정한 형식을 애호하면서 특정한 전형성을 구축한다. 

 이근삼의 경우에도 시초부터 희극작가로서 자신을 위치 지우려고 하지는 않았다고 판단된다. 초기작품인〈욕망〉을 보면 이근삼의 비극적 형식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욕망〉은 59년 작자가 유학할 당시 두 번째 작품으로서 늙어가는 노혁명가와 그의 일가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정통 희랍 비극의 형식을 많이 도입한 이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이근삼 적이지 못한 극이다. 다시 말해 형식적으로는 우화적이거나 서사적이거나, 아니면 표현주의적 기법 등 현대적인 형식을 주로 사용하던 이근삼의 작품 경향과는 달리 정통 비극의 형식을 취할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는 유쾌한 즐거움보다는 감성적 소구와 카타르시스를 유발하는 비극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평자들은 이근삼의 희극분석에 치중하면서〈욕망〉을 매우 예외적인 작품으로 치부하고 대체로 분석 대상에서 제외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다른 어떠한 작품보다도 이근삼의 문제의식, 곧 비극적 현실에 대한 인식을 추출하는데 유리한 면을 갖는다. 즉, 30대 이후 고인이 될 때까지 ‘사회적 필요와 개인적 욕구의 좌절’이라는 이근삼의 문제의식은 지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로 이근삼은〈욕망〉 이후에 비극 창작에 대한 욕망을 포기한 것일까? 물론〈율보〉와〈게사니〉 등과 같은 비극을 창작하지만, 파편적이고 분절적인 작업으로 존재한다. 한마디로 비극 창작에 있어서 이근삼은 전형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도 독재라는 폐쇄 사회에서 자신의 비판 정신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한 방편으로 비극보다는 희극을 선호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코메디보다도 웃기면서도 너무나 슬프고 공포스러운 한국 사회를 향한 반항과 항변은 비극적 양식의 직접적 공격보다는 희극적 양식의 간접적 공격이 보다 안전하고 수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작가의 개인적 성향도 희극을 선호하게끔 만든 것 같다. 삶 자체가 유머러스하고 시니컬한 이근삼으로서는 비극을 쓰는 고통보다는 희극을 쓰는 고통이 보다 즐거웠다고 예측된다. 아울러 형식에 매달려 글을 쓰는 스타일이 아닌 이근삼은 형식적 틀이 강한 비극보다는 자유롭게 표현양식을 선택하기가 좋은 희극을 더 선호했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면 이근삼의 대표적인 비극인〈욕망〉을 분석하면서 그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표출되고 있는 비극성의 전모를 밝히는 첫걸음을 내딛기로 한다. 〈욕망〉은 정치적 혼동기에 발생한 가족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얼핏 보면 이성일이라는 노혁명가의 욕망과 좌절이라는 이야기로 보이지만 좀 더 심층적으로 파악하면 이성일이라는 낭만주의자와 고은경이라는 현실주의자 간의 갈등이 이야기 구조의 중심축을 이룬다. 각각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이라는 사회적 배경에서 상이한 개인적 욕망을 추구한다. 이성일은 독립운동가라는 정당성을 근간으로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려고 하고, 반면에 고은경은 집안의 富를 지켜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양자의 욕망은 필연적인 모순에 빠진다. 정치는 돈을 요구하고, 그에 따라 이성일과 고은경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대결의 국면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해결은 가부장제라는 한국사회의 가족구조가 담당한다. 너무도 강력한 억압기제인 가족제도 앞에서 고은경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개인적 욕망을 좌절당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성일은 자신의 치명적인 결함으로 인하여 정치적 욕망이 좌절되면서 가족 전체를 비극적 상황으로 내몬다. 이성일이 욕망을 실현하기에는 사회가 그리 녹녹치 못한 것이다. 게다가 이성일이 20년 기간 동안 부재하던 중 고은경은 부를 지키려는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친일 권력자인 박덕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아들 이원일을 낳는다. 비극의 조건은 개인적 욕망과 관련되어 필연적으로 배태된 것이다. 

 사회와 개인적 욕망의 함수관계에 대한 이근삼의 평가는 이렇게 시작된다. 물론〈욕망〉은 그리스 비극을 모태로 써졌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영웅이 자신의 실수와 환경의 조롱으로 인하여 추락하는 정통 비극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근삼은 한국 현실과 비극을 관계 지으면서 자신의 독특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사회현실을 거부하지 않고 도리어 타협하거나 적극 수용하는 모든 인간의 욕망은 좌절되어야 한다는, 다분히 윤리적인 색채의 비극 정신이 탄생한 것이다. 〈욕망〉의 경우 고은경은 일제 강점기라는 비도덕적뿐만 아니라 민족 전체의 위기가 증폭된 시절에도 오직 자신의 부만 지키려는 개인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게다가 그 욕망의 실현을 위하여 도덕과 양심을 팔고 친일파 인사와 불륜의 관계를 맺을 정도이다. 또한 이성일은 만주에서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통하여 삶을 유지하였다. 그런 자가 단지 독립운동가라는 레테르만 갖고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근삼은 이러한 이성일과 고은경의 부도덕하고 비인간적인 욕망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나〈욕망〉은 사회 일반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생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단지 개인의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욕망을 좌절시키는 데 그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작품들 속에서 사회의 비인간적인 구조에 대한 이근삼의 평가는 절묘하게 다루어진다.

 1960년과 1961년에 발표된〈원고지〉와〈동쪽을 갈망하는 족속들〉, 그리고〈거룩한 직업〉 등은 그러한 인식을 명쾌하게 보여 준다. 작자가 자신의 인생을 예측하며 집필했다는〈원고지〉는 대학 교수의 소외된 인생을 희극적 터치로 형상화한다. 평자들은〈원고지〉를 “당대의 조야한 리얼리즘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한국 연극계에 새로운 기법과 신선한 감각으로 현대 연극의 계기를 마련한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이는 매우 정당한 평가이지만 다소 형식에 치우친 평가일 수 있다. 사실상 중요한 것은 내용적으로 자본주의사회의 소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는 데 있다. 전 인격체인 인간을 하나의 기능으로 묶는 자본주의사회의 소외현상은 19세기 이후 문화와 사회과학의 지속적인 주제이자 문제의식이었다. 즉 사회구조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현상은 가장 주요한 현대적인 문제의식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이 당시 척박했던 한국 희곡계에 발생한 사실은 한국의 희곡작품들도 세계 희곡사의 한 지류를 형성할 계기를 마련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원고지〉는 가족 공간이라는 한정된 틀에서 소외현상을 묘사하고 있다. 교수는 부인과 자식의 욕구 실현을 위한 기계적 대상으로서 억압받고 소외받는 것으로 나타나지, 사회구조가 개인을 억압하는 보편적 기제로서 명확히 설정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는 작가가 자신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써 자전적 성격이 강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거룩한 직업〉은 분업체계의 비인간성에 대하여〈원고지〉보다 심화된 묘사를 보인다. 교수는 30년간의 학자 생활을 돌이켜보며 그 삶이 정말로 자신과 어울렸는지를 회의하고 새로운 모색이 가능한가를 자문한다. 그 답은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단지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세상에서 자신과 어울리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냐는 한탄뿐이다. 결과적으로 한평생 몸을 담은 직업에 대한 때늦은 후회는 바로 소외된 인간의 전형을 표현하는 것이다. 

 1988년도에 공연된〈향교의 손님〉에서 이근삼은 이러한 소외현상에 대하여 방점을 찍는다. 사회적으로 별 볼 일 없는 거지에 농락당하는 학자의 마지막 절규는 자본주의적 소외의 비극적 결과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당신이 내 집으로 가시오. 낯이 뜨거워 못 가겠다. 야, 이 세상 좀 바꿔 가면서 살자꾸나. 답답하다! 좀 바꿔 가면서 살자. 밤낮 그놈은 그 자리에 있고 요놈은 요 자리에만 있고. 빌어먹을 세상이야. 그래도 이놈의 세상이 좋다는 놈도 있으니……”

 

 보결 인간들의 서러움을 우화적으로 표현한〈동쪽을 갈망하는 무리들〉은 보다 보편적으로 사회구조와 관련하여 소외 문제를 다룬다. 즉, 소외는 단순히 개인이나 가족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발생하는 보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의 비인간성에 대한 이근삼의 평가가 내재되어 있다. 만약 인간을 기능적인 일류로 만드는 것만이 사회가 갖는 지고지선의 선이라면 그 사회는 가장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사회의 비인간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면 그 필연성은 궁극적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배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동쪽이라는 상징적 의미는 가장 인간적이고 희망적인 욕망의 대상이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쪽을 갈망하는 것은 마치 유토피아를 향한 욕망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동쪽에 대한 갈망은 이제 일류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가치로 전화하였다. 다시 말해 사회구조가 알게 모르게 인간을 강압하여 이상의 속물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게다가 일류는 소수만이 갖는 특권이다. 자본주의사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계급이나 계층별로 견고한 피라미드 구조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류를 꿈꾸며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실천하지만, 사회구조는 그렇게 쉽게 그러한 실천의 성과를 허용하지 않으며, 결코 모든 이들에게 허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결과 동쪽을 갈망하는 무리들은 허상의 미로 안에서 뺑뺑 돌기만 하고 궁극적으로는 인생에 대한 방향 감각마저 상실하고 만다. 그야말로 현대인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동쪽을 향하여, 곧 욕망의 필연적인 좌절을 향하여 부나비처럼 타들어 갈 뿐이고, 그들이 남긴 흔적은 비극 그 자체이다.1963년 들어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사회에 대한 이근삼의 공격은 더욱 치열해진다.〈위대한 실종〉과〈인생개정안 부결〉을 통하여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사회에 타협한, 아니 그런 사회를 적극 추종한 인간들의 비인간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60년대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의 정착이 눈에 띄게 형성되는 시기로서 돈의 가치가 최고라는 상업주의적 성격이 전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전근대사회에 남아있던 미덕과 인간주의적 정서는 이제 박물관에서나 관람할 수 있는 회고적 가치로 전락한다. 이근삼은 본격적으로 가치의 아노미 현상이 발생한 현실에 대하여 선제공격을 한 것이다. 

 〈위대한 실종〉은 아버지의 생사보다도 돈과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적 풍토로 인하여 발생하는 해프닝을 희극적 터치로 구현한 작품이다. 죽었던 아버지가 살아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성대한 장례식의 명분과 실리를 지키기 위하여 죽은 것으로 하고 숨어 살라는 가족의 요구는 너무나 비극적인 클라이막스였다. 그러나 이는 작품을 직접적으로 해독할 경우 나타나는 비극이다. 이근삼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한 비극은 사실상 구가치의 무기력한 죽음이다. 작품에서 서예가 맹팔용이 구시대의 가치를 대변한다면 음악가이며 방송인인 공미순은 새로운 가치를 상징한다. 그리고 맹팔용이 사회적으로 점점 더 주변인으로 전락하는 반면에 공미순은 중심부에서 노닌다. 이에 따라 공미순의 언어는 권력을 가지지만 맹팔용의 언어는 상대적으로 무기력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맹팔용의 유일한 선택은 도피였다. 그러나 도피는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더욱 심각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살아있으나 그는 죽은 것이다. 살아있는 것에 대한 사망선고는 그것의 존재가치가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구가치의 종말은 1960년대 초에 이렇게 비극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한편〈인생개정안 부결〉은 한 사기꾼의 행위 양식을 통해 사회의 비도덕성을 조롱한다. 1960년대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의 춘추전국시대였다. 자본주의 질서가 정착하는 단계이므로 자본의 대상과 영역은 무궁무진했지만 동시에 자본은 규모나 안정성이 상대적으로 취약하였다. 그 결과 자본의 흥망성쇠가 1980년대 초까지 부침을 거듭한 것이다. 게다가 법질서는 체계성과 완성도가 떨어져 공정한 규칙에 의한 경제전쟁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환경 아래서 사기적인 한탕주의는 자연스러운 법칙인 것이다.

 〈인생개정안 부결〉의 복석 역시 한탕주의를 꿈꾸며 사기행각을 벌인다. 하지만 재수가 없었던지, 실패하여 감옥으로 직행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이다. 복석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반성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실패에 대한 분노나 두려움도 없다. 단지 더 큰 일을 위한 구상을 할 뿐이다. 왜냐하면 사회 전체가 사기꾼들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있다면 자신은 사소한 실패를 경험한 것이고, 그것은 한탕을 위해서는 겪어야만 하는 사소한 기회비용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적 필요와 개인적 욕구가 모순 없이 유기적으로 통일되는 지점은 사기적 행위라는 공간이다. 이근삼이 보는 당대의 현실은 그렇게도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 공간인 것이다.

 1960년대 초에 보였던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1966년〈국물 있사옵니다〉에서 만개하여 나타난다. 다시 말해 1960년대 한국 최고의 희곡으로 공인받은〈국물 있사옵니다〉는 작품의 질이나 내용에 있어서 앞선 작품들의 완결판과도 같은 것이다. 이근삼은 사회에 대한 진지한 탐색전을 벌인 후 이 작품을 통하여 1960년대 사회상의 전체적인 단면을 명쾌하게 그린다.

〈국물 있사옵니다〉는 김상범이라는 젊은이가 비인간적인 사회에 적합한 가치로 전환을 꾀한 후 사회적 지위가 승승장구하는 성공담이다. 마치 아메리칸드림을 연상시키듯 60년대식 코리안 드림을 상징화한 것이다.

김상범은 여느 젊은이처럼 순수한 인간이었으나 자신의 인간적 가치가 출세라는 욕망과 배치되자 새로운 상식을 선택하여 욕망의 실현을 추구한다. 마치〈인생개정안 부결〉의 복석이 처럼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삶을 전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상식은 비인간적인 사회적 가치와 일치된 비윤리적인 도덕관이다. 자신의 이기를 위해서는 타인의 이기를 말살하는 잔인한 가치관이며 필연적으로 비인간적인 굴레로 추락할 수밖에 없는 가치관인 것이다. 새로운 상식이 갖는 비극적 양식은 사회적 성공이 반드시 인간적 추락을 수반하는 그 필연성에 있다.

 작품 속에서 김상범은 화려한 변신을 자행한 후 그야말로 자신의 욕망을 의도한 바대로 달성한다. 간혹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끝까지 괴롭힌 전문적 사기범 탱크를 정당방위로 위장하여 죽인 다음에는 탄탄대로만이 열려져 있다. 급기야는 사장의 며느리이자 未亡人인 성아미와 결혼하면서 장래 회사의 사장 자리가 보장되는 기회마저 얻는다. 코리안 드림의 성공은 거의 손아귀에 잡아놓은 양상이다. 그러나 이근삼은 여기에서 작품을 끝맺지는 않는다. 할리우드식 성공담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비극적 요소의 도입이라는 숨겨놓은 비장의 칼을 휘두른다. 성아미는 박전무와의 관계로부터 불륜의 씨앗을 잉태하고 상범은 결혼과 함께 자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럴 경우 새로운 상식은 어떠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성아미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거부해야 하는가? 구상식으로서는 사실상 매우 쉬운 문제이다. 즉 구상식은 모든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대상을 거부할 명분과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김상범의 새로운 상식은 그것을 거부할 만한 정당성이 전혀 없다. 또한 그러한 상식으로 행위를 한 김상범 자체는 더더욱이나 도덕과 윤리를 말할 자격조차 없다. 결국 새로운 상식은 거짓과 위선으로 불륜의 씨앗을 자식으로 인정하게끔 한다. 이제 상범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건전한 도덕관을 가졌던 시절처럼 동전을 던져 점을 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막연히 가졌던 희망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수렵사회의 생존 법칙에 자신을 내던진 업보는 상상 이상으로 인간적인 희망과 꿈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그러면 소외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인간적 꿈과 희망을 저버리는 자본주의사회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1969년 발표된〈유실물〉은 잠정적인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마치 에리히 프롬의 존재론과 유사한 문명 비판적인 진단이다.〈유실물〉에서 노파가 자신이 상실한 것은 꽃다발이 아니라 꽃의 향기라고 말할 때 이근삼의 관점을 읽을 수 있다. 이근삼은 소유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존재의 의미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유라는 욕망에 갇힌 현대인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정신적 불구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사회의 문제는 인간의 소유욕을 극도로 자극하는 동시에 인간적 가치를 파괴하는 경향에 있는 것이다. 후기 작품인〈이성계의 부동산〉은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하여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유실물〉의 잠정적 결론을 재차 증명하면서 소유욕에 빠진 현대인의 비극을 완결 짓는 것이다.

 이성계의 부동산이 상징하는 의미는 바로 현대인의 소유욕과 등치된 대상물이라는 데 있다. 후처와 그 소생들은 이성계라는 존재를 사랑하기보다는 그의 소유물에 애착을 갖는다. 게다가 그들은 상속 문제로 본처의 아이들마저 죽이는 잔인한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성계는 이러한 현실을 용납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선할 능력도 없다. 따라서 그의 유일한 선택은 환상 속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환상에서나마 존재가치를 느끼도록 도와준 복지원 원장에게 자신의 부동산을 처분한 후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며 이성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 내 이 두 손을 봐라. 텅 비었어. 맨 손이야. 맨손으로 간다. 가슴이 후련하다.”

 

이성계 역시 평생을 빼앗던 소유욕을 한순간에 버리자 해방감을 맛본다. 그도 소유욕에 억압당한 전형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환상 이외에 어떠한 현실 공간에서도 인간적 가치를 실현할 수 없는 소외된 현대인은 비극적인 존재이다. 자본주의사회의 소외 문제를 다룬 이근삼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사회적 개입을 실행한다. 하나는 정치에 대한 직설적 공격이고, 또 하나는 지배층의 권력과 인간의 문제이다. 정치에 대한 이근삼의 분노는〈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와〈제18공화국〉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요즘 읽어도 상당히 통쾌한 면을 볼 수 있다. 당시의 절대 권력자들이 왜 탄압하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 정도이다. 물론 설령 개인적 탄압이 없었을지라도 정권은 공연금지라는 최소한의 칼을 들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두 작품을 정치극으로서만 읽는 것은 작품의 가치를 온전하게 보전하지는 못한다. 좀 더 보편적으로 보면〈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와〈제18공화국〉은 모든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공격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특히〈제18공화국〉에서 과학의 神話와 절대성에 대한 이근삼의 조소는 매우 탁월한 사회과학적 감각을 보인다.

 절대적인 가치는 사실상 비극의 조건으로 기능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른 가치들을 억압하여 소외현상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유사한 논리로 헤겔은 작중 인물이 자신의 상대적인 선택을 절대적인 선택으로 오판할 경우 비극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여하튼〈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와〈제18공화국〉은 희극적 터치의 공격으로만 끝난다. 만약 이근삼이 비극적 요소를 도입했다면 절대성이 갖는 비극성을 매우 강력하게 표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1969년에 발표된〈광인들의 축제〉는 일종의 변형된 정치극으로서 지식인의 허위와 가식으로 발생한 비극적 행위를 세련되게 형상화한다. 작품 내용은 학자인 이매명과 무대협회 회장인 이화령, 그리고 김 記者가 정신병자들의 세계에 타협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즉 이매명과 이화령은 현실에서 억압받던 개인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정신병자의 세계에 적극 가담하고, 반면에 김 기자는 사랑하는 애인이 정신병자로 탈바꿈하는 데도 자신의 생존만을 위하여 무책임하게 방관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그들은 욕망과 생존을 위해 자신의 사회적 존재 가치에 걸맞은 역할과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현실은 비극적 조건을 잉태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 굴레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유일하게 남는 것은 기회주의라는 치욕적인 어휘일 뿐이다.

1974년과 1975년 연이어 나온〈30일간의 야유회〉와〈아벨만의 재판〉에서 이근삼은 방향을 전환하여 권력과 인간의 문제를 탐색한다. 특히〈30일 간의 야유회〉는 근본적인 인간의 문제를 들고나온다. 이근삼은 사회의 유망한 지도층과 최악의 층인 죄수집단을 대비하면서 과연 인간의 차이가 자연스러운 것이냐고 질문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 사회에서는 양자의 차이가 극단적으로 드러나며 그러한 구분과 차이가 자연스러운 것인 양 나타난다. 그 결과 권력자와 지도층은 사랑을 베푸는 자로, 반면에 죄수는 선도 받아야 할 자, 또는 사랑을 받아야 할 자로 인식된다. 이근삼은 그러한 고정관념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파악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지도층과 죄수들을 데리고 현실 세계와 단절되고 괴리된 고도로 달려간다.

 문명과 단절된 고도는 오직 자연적 질서에 맞추는 생활만을 요구하고, 그에 따라 최소한도의 원시적인 협업 질서가 구성된다. 그런데 현실 세계의 지도층은 고도의 생활을 이끌어 가기에는 무력하여 죄수 중에서 지도자가 나온다. 한마디로 질서가 완벽하게 뒤바뀐 것이고,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필수 불가결한 선택이다. 현실의 지도층은 불만 섞인 불평을 해대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것뿐이다. 작가는 여기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지배와 피지배로 나뉘는 것은 역사적인 특수성이고 인위적인 조작일 뿐, 궁극적으로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죄수 18번과 신신옥을 결혼시킨다. 봐라, 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냐고 강조하면서!

 그러나 작가는 해피엔딩으로 끝맺지는 않는다.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냉혹한 공간이며, 그러한 결혼을 절대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과 연계지어 줄 구조선이 나타나자 막 자라난 인간 평등의 관념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결혼은 공식적으로 취소된다. 현실의 불평등한 관계는 무서울 정도로 완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은 비극적인, 너무나 비극적인 공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에〈아벨만의 재판〉은 권력층에 의해 핍박받는 민중의 고달픈 삶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아벨만으로 상징되는 인물은 자기 일을 묵묵히 해 나가는 민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또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혀 모르고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그런 순박한 사람들인 것이다. 하지만 권력층은 그들을 온전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어떨 때에는 부려먹고, 어떨 때에는 희생양으로 이용하고, 또 어떨 때에는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작품은 권력의 이기적인 욕망에 희생당하는 민중의 비극적 삶을 형상화한다.

 전쟁에서 패했을 뿐만 아니라 적국에 동조한 권력층은 자신들의 명예와 권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아벨만을 희생양으로 선택한다. 아벨만은 자신이 재판을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도 모르면서 부지불식간에 죄인으로 규정당하고, 급기야는 마을을 떠나야 할 처지가 된다. 사건에 대한 원인도 모르는 채, 또 별다른 항변도 제대로 못 한 채 애정 어린 고향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근삼은 결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비극적인 상황을 더 비극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하여 도망가는 아벨만과 루시아를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누가 이 비참한 인생을 책임지느냐고, 그리고 누가 책임진 적이 있었느냐고 항변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벨만의 이야기는 사실상 우리나라 역사의 일 단면이다. 작가의 말대로 작품은 6.25 전쟁 당시 도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엉뚱하게 전범자 비슷한 대우를 받았던 기억을 되살려 쓰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는 이근삼의 작품에 나타나 있듯이 그만큼 비극적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작품에 나타난, 이근삼이 표출하고자 한 역사와 사회, 그리고 삶의 비극성이 무엇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압축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 

이근삼은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중심축으로 하여 비극의 조건들을 형상화한다.

   사회적 필요와 개인적 욕망과의 모순으로 발생하는 비극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인 사회와의 타협이나 적극적 수용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비극을 세련되게 제시한다.

둘째, 

자본주의사회의 소외현상은 1960년대부터 지속적이고 일관된 이근삼의 문제의식이다.

   소유가 존재를 압도하면서 발생하는 비극이나 기능적 인간형의 양산이 가져오는 비극을 진지하게 형상화한다.

 

​셋째, 

지배적인 권력과의 관련 아래서 발생하는 다양한 비극적 조건들을 형상화한다.

권력과 지식인, 지배층과 민중 등을 가상적 현실이나 역사적 사건의 비유로 구성하여 비극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근삼이 표출한 역사적, 사회적 그리고 삶의 비극성이 그러하다면 한 가지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도대체 이근삼은 어떠한 전망 속에서 사회를 바라보느냐”는 문제이다. 물론 작가는 정치가나 사회이론가, 정책가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 비전을 하나의 논리로 구성해 밝힐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작가는 알게 모르게 바람직한 사회의 전망이나 당위를 작품에서 피상적으로나마 표출하기도 한다. 설령 전혀 발견할 수 없을지라도 작가가 비판하는 사회적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퇴치하는 것이 일종의 사회적 전망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작가의 가치와 전망은 필연적으로 작품 내에 상존할 수밖에 없다. 단적으로 말해 작가는 현재나 미래의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이근삼의 작품들은 생각보다 사회적 비전을 강하게 표출한다. 그리고 작품들의 행간에 숨어있는 의미들을 잘 구성한다면 아마도 이근삼의 사회관과 역사관을 규명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특히 이러한 면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은 1971년에 발표된〈유랑극단〉이다.

 〈유랑극단〉은 가장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인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유랑극단을 짊어진 지식인과 민중들의 삶을 형상화한 것이다. 여기서 이근삼은 심각한 질문을 한다. 만약 사회가, 권력이 개인이나 민중, 또는 대중을 극단적으로 억압할 경우 역사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라고. 아마도 저항도 할 것이고, 타협도 할 것이며 포기도 할 것이다. 〈유랑극단〉은 그러한 다양한 행위 양식들을 여러 가지 전형적인 인물들로 표현한다. 오소공과 같은 양심적인 지식인은 처벌을 각오하며 저항하고, 수염과 금강산, 지리산 등 민중들은 함께 투쟁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며 개인적이기를 탐닉하기도 한다. 또한 차 사장과 길 형사는 현실과 타협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거나 아예 일제의 앞잡이로 살아간다. 한마디로〈유랑극단〉은 일제 강점기의 삶, 그 자체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런데〈유랑극단〉은 여느 작품들과는 달리 구성상 독특한 측면이 존재한다. 대체로 이근삼의 작품들은 비극의 가능성을 잠재해 놓았다가 작품의 질과 연관 지어 비극적 요소를 선택적으로 사용한다. 하지만〈유랑극단〉은 전통적인 비극들처럼 애초에 비극적 결말을 예정하며 전개한다. 즉, 유랑극단은 사소한 실수나 착오만 있더라도 해체될 것 같은 위기가 언제나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오소공이 반일 연극을 공연한 바에야 해체는 필연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재미난 일은 작품이 비극으로만 치닫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근삼의 역사 인식은 일제 치하의 고단하고 비극적인 삶을 형상화하는 데서 타협하지 않는다. 바로 신세대인 진세실과 만삭을 통하여 유랑극단의 새로운 역사를 탄생시킨다. 오소공의 실패와 구 유랑극단의 해체는 궁극적인 패배가 아니라 작은 실패인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유랑극단은 ‘이상, 민족, 예술’이라는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역사의 수레바퀴를 다시 돌리는 것이다. 

 〈유랑극단〉의 내용에 비추어볼 때 이근삼의 역사 인식은 낭만적인 민중관에 입각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다른 작품들에서 나타난 평등주의적 인간관이나 권력층과 지식인층에 대한 비난과 조소를 고려해볼 때 이근삼은 역사의 주체를 특출난 영웅이나 소수의 지도자, 또는 엘리트들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대중, 또는 민중들로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이근삼이 대중 모두를 비판 없이 역사의 주체로 용인하는 것은 아니다. 1981년에 발표된〈꿈 먹고 물을 마시고〉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일단의 답을 제공한다. 작품은 음식점 주방장과 슈퍼마켓 점원, 호스티스 등과 같은 대중들의 삶을 희극적으로 그린다. 주인공들은 사회의 비도덕적인 풍조에 물들어 자신의 정체를 속이고 식품회사 연구원과 컴퓨터 담당 회사원, 대학생 등으로 존재를 위장하고 가장한다. 이근삼은 그러한 가장을 애정 어린 눈으로 보아주지만, 끝까지 용인해주는 것은 아니다. 어려운 곡예 끝에 서로의 정체를 인식하자 솟구치려는 애정도 뒤로 하고 뿔뿔이 흩어진다. 그리고 대문과 복희는 자신의 처지에 맞게 성실하고 건전한 삶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근삼은 진자에 대해서는 끝까지 용서하지 않는다. 설령 진자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어야 하는 어려운 위치에 있더라도 호스티스와 같은 비도덕적인 방법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대문의 프러포즈에 대한 진자의 거절로 끝나는 종말은 타락한 인간의 말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근삼은 양식 있고 건전한 대중들이 간혹 세태에 빠지는 경향이 있더라도 그들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4. 결론

이근삼은 희극작가인가, 아니면 비극작가인가? 대부분의 평자들이 희극작가로서 여기는 상황에서 이러한 질문은 하나의 우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근삼은 단순히 희극작가라고 평가받기에는 아쉬운 면이 많다. 왜냐하면 그가 표출하고자 한 삶의 비극성이 너무나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순수 비극과 순수 희극이 사라진 작금의 현실에서 특정 작가를 희극작가로 가두어 둘 필요도 없다.

비평가들은 진정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살아 숨 쉬며 비평가의 방문을 언제나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공간은 바로 구체적인 작품이다. 그곳은 무한한 해석의 다의성을 언제나 준비하고, 설령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올지라도 인심 좋게 맞이한다. 그러나 거기에도 예외는 있다. 독단적 사고와 절대적인 평가에 의하여 주인에게 삿대질하는 손님은 별반 반기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전공 상 이근삼의 작품세계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하지만 평소의 안면을 핑계 삼아 슬쩍 방문하여 만찬장에 찬으로 놓여 있던〈국물 있사옵니다〉와〈광인들의 축제〉,〈아벨만의 재판〉 등을 안주로 기분 좋게 한잔하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손님들이 “이근삼의 만찬장에는 언제나 단맛이 난다”라고 평가하는 그 맛과는 상당히 달랐다. 필자의 미각이 문제였던지, 음식들이 짜게 느껴졌다. 아니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짜서 음식 먹기를 중단하고 냉수를 벌컥 들이마셨다. “도대체 무슨 양념과 조미료를 넣었기에 이렇게 짤까”하면서도 혹시 나의 미각이 문제일지도 몰라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연극 전공의 후배에게 “너무 짜지 않냐?”고 동의를 구했다. 헌데 그 친구는 “그래도 달지요. 주인도 아마 당신의 음식이 달다고 생각할 거예요”라고 아예 동의 자체를 거부했다. 갑자기 오기도 생기고 필자 같은 미각을 가진 사람들의 평가도 중요할 것 같아 집에 가서 이 양념, 저 양념 치면서 이근삼 요리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노력한 결과가 있었던지, 결정적인 양념 하나를 찾았다. 그것은 정갈스러운 ‘삶의 비극성’이었다.

 형식적으로 보면 이근삼은 당연히 희극작가로 규정당할 만하다. 하지만 내용과 주제, 또는 사상 등으로 평가하면 희극작가로만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근삼은 현대적인 비극작가가 가질 조건들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에 억압당하는 인간 소외 문제나 권력의 비인간적 속성과 같은 문제의식들은 서구에서도 보편적인 비극적 주제들인 것이다. 따라서 이근삼을 현대적인 비극작가로 규정해도 언어도단으로 치부될 만한 일이 아니다.

 이근삼의 작품들은 대단히 다의적이라는 장점을 갖는다. 리얼리즘으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여러 비평적 관점에 따라 작품에 대한 해석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근삼에 대한 종합적 평가는 대체로 이러한 작업들을 수행한 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 후 이근삼이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우리나라 희곡사에 큰 획을 그은 작가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없이 확인될 것이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