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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자보다는 자유인의 인생으로

한국 희곡 - 2003년 가을호 

                  희곡인생 회고록 - 이근삼

평양시 대찰리. 내가 태어나 근18년 동안 살았던 고향이다.

 화신 백화점 네거리에서 보통 강 쪽으로 서문통이 뚫려 있다. 대찰리는 종로 네거리에서 서문통을 따라 한200m쯤 가면 왼쪽에 자리잡은 느슨한 언덕에 펼쳐져 있는 동네다. 언덕 위에는 평양시에서 제일 크다는 남산재 교회가 있어 일요일이면 골목은 교인들로 가득했다. 국무총리를 지낸 이윤영 목사도 한때 이 교회에서 봉직했다.​

 교회로 가는 길 건너편에는 아담한 외국 선교사들의 숙소가 있어 조선말을 잘 하는 이들 선교사의 출입을 우리 꼬마들은 신기한 눈으로 처다 보곤 했다. 대찰리를 중심으로 많은 학교가 산재해 있었다, 숭실전문학교, 평양신학교, 광성중학, 정의여중, 정의소학교, 평양신학교, 광성중학, 정의여중, 정의소학교, 광성소학교를 비롯 서문통 건너 서문여중, 숭의여상 등 평양 시내서 가장 많은 학교가 밀집되어 있었던 곳이 대찰리였다. 우리는 무리를 지어 이들 학교의 교정을 드나 들며 해가 질 때까지 뛰고 싸우고 공을 차며 정신없이 놀았다. 가끔 독립군 놀이도 했다. 전설 속의 김일성 장군이 우리의 우상이어서 나도 긴 막대기를 허리춤에 차고 김일성 역을 맡기도 했다. 나의 큰 형이 해방 후 김일성 장군 환영 시민 대회에 갔다가 가짜 김일성 장군을 보고 실망하던 일이 생각난다.

개구쟁이 시절 나의 행동반경은 이웃 학교 뿐만이 아니라 우리 집 바로 뒤편에 있던 기독병원동산 모단(모란)봉 그리고 집에서 1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서기산도 포함되어 있다. 때로는 신양리길을 따라 멱짜구(개구리) 잡으러 보통 강에 갔으며 형을 따라 대성산에도 가곤 했다.

 우리 동네서 모란봉으로 가는 길은 두 개가 있었다. 하수구리 상수구리를 지나 평남도청이 있던 만수대를 거쳐가는 길과 종로 거리를 따라 대동문을 지나 대동강을 끼고 타는 길이 있다. 대동문을 지나면 기생 학교가 있어 장구 소리며 새끼 기생들의 창도 들을 수 있었다. 개구쟁이 눈에도 새끼 기생들은 인형처럼 곱게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대동문 코스를 택했다. 을밀대에서 유유히 흐르는 맑은 대동강을 내려다 보는 재미는 일품이었다. 상류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흰 돗단배들 어디서 떠내려 오는지 모를 뗏목들, 그 사이를 분주히 까불며 다니는 매생이 배들. 매생이는 손바닥만한 1인용 배로 고기잡이와 수중 택시 역할을 하는 대동강의 명물이었다. 평양은 온 거리가 나의 놀이터요 공원이었다.

4월이 되면 모란봉 길은 벚꽃으로 뒤덮였다. 한밤 중 임시 가설한 전등불에 반사되는 벚꽃이 좋아 사람들은 밤새 모란봉 산책로를 걸어 다녔다. 대찰리와 산양리 사이의 가로가 밤이 되면 야시로 변했다. 온갖 장사치들이 나와 소리를 지르며 손님을 불렀고 우리는 이 진풍경을 구경하느라 귀가 시간도 잊어 집에 가서 벌을 받기도 했다. 그 때 같이 밀려다니던 효덕이. 뺀따이, 운용이, 하이칼라, 안재비 등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의 큰 형은 어렸을 때부터 독서광에다 자칭 소설가였다. 나도 그 영향을 받아 중학에 들어가기 전에 신호사에서 나온 세계 문학 전집을 거의 다 훑어보았을 정도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우리 세형제는 돈만 생기면 일인들 거리인 '미나카이' 백화점 근처의 서적상을 뒤졌다. 대찰리 고개를 내려오면 평양 도서관이 있었고, 더 가면 이른바 신시가가 평양역까지 뻗쳐 있었는데 일인들이 상관을 쥐고 있던 지대다. 그 쪽에 들어서면 왜 그런지 낯설었다. 우리 동네 아이가 도서관 근처서 일본 애들한테 매를 맞아 우리는 복수를 한답시고 뭉둥이를 들고 패거리로 현장에 출동 했던 기억도 난다.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되신 어머니는 우리 세형제를 키우시기에 무척 고생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가끔 냉면을 시켜 주셨다. 냉면은 주로 겨울철 한밤중에 먹었다. 영하 20도나 되는 밤에 냉면을 시키면 배달부는 냉면 그릇을 긴 목판에 몇 그릇을 올려놓고 목판을 한 손으로 받쳐 들고 자전거를 타고 배달해준다. 이 냉면 배달꾼은 평양의 명물이었다. 냉면 몇 십 그릇을 목판에 올려놓고 한 손으로 가볍게 목판을 받쳐 들고는 나머지 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조작하여 시내를 질주하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곡예사와도 같았다. 냉면에는 꿩고기가 듬뿍 들어있었다. 추위에 떨며 그 차디찬 냉면을 먹는 멋을 이남사람들은 알 리가 없다. 냉면 다음의 명물은 김치말이 밥이다. 한겨울 밤 얼어붙은 동치미 국을 떠다 찬밥을 말아서 먹는다. 서울 토박이인 내 아내가 결혼 초기, 김치말이를 달라니까 처음엔 놀랐지만 같이 살다 보니 이제는 가족 모두가 김치말이를 즐기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한 것은 노티였다. 대개 추석 명절 때 만드는 노티는 찹쌀과 길기미가루를 혼합해 만든 빈대떡 보다 작은 쌀과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보관해 두었다가 긴긴 겨울 밤 불에 구워서 먹기도 했다.

 우리 세 형제는 종로 거리에 있던 종로 국민학교에 다녔다. 그 때만해도 입학 시험이라는 것이 있어 아무나 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북지에서 전쟁이 터졌고 이어 시간표에서 조선어 과목이 없어졌다.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창시 계명이라는 것이다.

6학년 때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진주만에서 싱가포르에서 대승 했다며 우리는 밤에 등불을 들고 '이겼다 일본 단연코 이겼다' 라는 군가를 부르면서 시가 행진에 동원 되기도 했다. 친구들과 부벽루를 왼쪽에. 육나도를 오른쪽에 끼고 나있는 길을 따라 한시간쯤 걸어 주암산에 자주 갔던 생각이 난다. 대동강을 내려다 보며 우리는 전쟁이야기도 했고 요샛말로 진학 문제도 토론했다.

 나는 평양사범학교에 진학했다. 내 뜻과는 관계없이 교장이 어머니를 불러 협박 반 설득 반으로 사범학교 진학이 결정됐다. 100명 정도 뽑는데 2000여명이 몰려들어 시험을 일주일 동안이나 치렀다. 일본 학생들은 공짜로 넣어주니 경쟁률은 40대 1정도였다. 평양사범학교는 교사를 양성하는 곳으로 5년제였다. 옷, 구두, 모자, 책가방 등 모든 것이 공짜였고, 매달 그 때 돈으로 30원을 주었지만 사범 교육은 철저한 노예 교육이었다. 사범학교는 대동강을 건너 평양 비행장 쪽 문란리에 있었다. 나는 비가 오나 눈이오나 추우나 더우나 대동교를 거쳐 또는 대동문 밑에서 배를 타고 10리가 넘는 통학 길을 꾸역꾸역 항소처럼 왕복 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3학년 때부터는 학업을 전폐하고 우리는 비행장 노동자로 가동 되었다. 가끔 꾀를 부려 비행장을 빠져나와 금천 대좌에 가서 극단 ‘고협’의 공연을 보았다. 황철이라는 배우가 좋았다. 금천 대좌를 비롯 계약관, 키네마, 제일극장… 이 극장들은 나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평양 비행장에서도 가미가제 특공대가 오니키와를 향해 떠나곤 했다. 우리는 줄을 서서 죽음의 길로 가는 어린 소년병들에게 손을 흔들곤 했다. 내가 4학년 때 해방이 되었는데 그 다음 해 2월 초에 신의주 학생 사건이 일어나고, 평양에도 그 바람이 불어 저도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삐라 뿌린다. 뭐한다 그러다가 결국 추락(퇴학)당했다. 퇴학 맞고 도망 다니는데 우리 어머니하고 큰 형님이 잡혀 들어가게 됐고, 결국 자수하고 학교에 복학해보니 내 동기인 신인섭씨 등은 다 5학년 수업하고 졸업했는데, 나는 유급되어 4학년으로 다시 들어가 반년 있다가 혼자 남하했다. 아마 그 때 도망 안 나왔으면 자금쯤 평양에서 최소한 인민학교 교장은 했을지도 모른다.

 

 1974년 나는 홀로 남쪽으로 넘어왔다, 우리 어머니하고 큰형님 하고는 ‘일단 도망가야 되겠다.’ 면서 ‘나중에 뒤따라 내려간다’ 하시며 함께 못 오시고 나 혼자만 내려와서 고생도 참 많이 했다. 서울역 벤치에서 며칠을 보내는데, 거지들 자는 데 가서 자다가, 거지들이 발로 차 잠자리를 뺏기기도 했고, 또 내가 그렇게 차지 하기도 하고… 그러다 신문에서 가정교사를 구한다는 기사를 보고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보통 가정교사는 한 명만 하는데 주인집 모르게 두개를 더 하면서 공부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지 3일 후에 감옥에서 돌아가셨는데, 당시 신문에 ‘도깨비’란 필명으로 글을 쓰셨다고 했으니, 일본 순사들에게 붙잡혀 돌아가신 것이다. 큰 형님은 내가 넘어 온 다음 해에, 작은 형님은 1,4 후퇴 때 다 넘어왔다. 그런데 우린 어머니는 과부로 고생하시며 처음으로 집을 장만 하셨기 때문에 통일되면 내려 오신다고 단순하게 생각하셨는데 그게 이별이 될 줄이야…. 미국에 있는 친척으로부터 어머님이 84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양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 한데도 고향이 내 마음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소식을 들은 이후 꿈에 보던 고향 모습도 통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고향이 바로 어머니였던 것이다, 나는 참 몹쓸 시대에 태어났다.

 

 9월에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혜화전문에서 편입생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때는 서울대나 연대는 4월에 시험이 다 끝났고 혼자 내려와서 공부 하려니 제대로 되지도 않는데다가 그 동안 내구를 좀 했는데, 배가 고파서 더 이상 못하겠기에 그만두었다. 그리고 나서 혜화전문학교를 찾아가 월반해 들어갔다. 이하윤 선생님이 그 때 교무 과장이셨는데 월반해서 2학년에 넣어 주셨다. 나를 잘 봐주셨던 그 분은 잊을 수가 없다.

 그 당시 우리 주위에서 1929년생들은 작가나 학자가 되는 건 거의 불가능했던 시대 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태어났을 때가 왜정 시대고 국민학교 2학년 때 조선말이 없어지고 일본 말로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범학교 들어가니까 2학년 때부터 영어가 없어지고, 2학년 말부터는 매일 근로 봉사를 해야 했고 해방 되니까 소련군이 들어왔고…아무튼, 우리 세대는 시대로 보더라도 안정되게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왜정시대에 대학에 다녔던 가람들이 공부 하기는 좀 수월한 편이었다. 어떤 모임에 가니까 ‘당신 29년생인데 어떻게 교수가 됐는가’ 하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혜화 전문 학교는 불교 전문 학교이기 때문에 불교 학과하고 경제 학과, 문과 3개 밖에 없었다, 해방 전에 전문 학교는 연전, 보전, 혜전 셋밖에 없었다. 그리고 연전, 보전 쪽은 전통이 있는데, 혜전은 불교 학교라 선배들이 좀 떨어지는 편이었다. 1년정도 다니고 나니 갑자기 학교가 없어지고 남산 꼭대기에 동국 대학이라는 게 생겼다. 거기에 2학년으로 올라가면 된다고 했는데, 편입금을 낼 이력도 없고 다른 학교에 갈 생각도 못하고 있는데 대학생들을 훈련시켜서 이북에 선전 공작원으로 보낸다고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좋아라 지원 했더니 차로 사흘이나 걸려 내려와서 부산의 통신 학교에 내려놓았다. 당시 고대 이문형씨 박찬기씨 등도 있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나니 자꾸 사단이 많아지고, 일반 보병들은 총 쏘는 건 가르치는데 통신에서 쓰는 모스부호 같은 것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것이 커뮤니케이션과 관계를 맺게 된 인연이었다. 그 훈련을 석 달 받고 나니까 모든 훈련병에게 일등병을 달아주는데 나는 반장이라고 하사를 달아주고서 전부 전선으로 보내졌다. 나와 몇 명은 육군본부 통신감실 보완과에 보내졌고, 몇 개월 후 통역장교로 시험 쳐 들어가게 되었다.

 

 통역 장교는 통역만 하는 사람들인데, 난 어떻게 태백산 전투 사령부로 파견되었고, 사령관은 나를 통역관이 아닌 부관으로 썼다. 그 때 육사가 생겼고 영어 잘하는 사람을 뽑았는데 그 때 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우연히 뽑혔다. 육사에 들어가니 서울대 총장이었던 김종운씨, 부총리였던 조순씨, 그리고 서울대 교수였던 황찬호씨가 있었다.

 52년에 군대 있을 동안 대학졸업장을 받고 55년 되니까 동국대에서 교수들 반 이상이 다 이북으로 납치되고 가르칠 사람이 없다면서 총장이 국방부에 공문을 내서 동국대 교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55년 10월 육사 11기가 졸업한 직후에 제대했다.

 대학에서는 영미 소설을 가르쳤다. 동국대학총장 서리를 한 김정근 교수, 시인 심경림씨, 오국근 교수 등이 모두 나한테 소설을 배웠다. 그런데 그것을 하면서도 마음 속에는 늘 연극이 하고 싶었다. 내가 자라던 평양에 기독교가 제일 먼저 들어왔고, 동네에도 기독교인이 제일 많았다. 게다가 기독교 계통의 학교가 전부 그쪽에 있었던 탓에 교회에서 1년에 2~3번 정도 성극을 했었다. 그 때는 그게 좋아 구경하러 다녔다. 사실 연극도 좋지만, 연극보다는 가난하니까 가면 꼭 공책하고 연필하고 빵을 줘서 자꾸 가다 보니 취미가 된 셈이다.

 

 책은 참 많이 읽었다. 주로 희곡으로 읽으며 연극에 대한 열정을 식히고 청계천 샅샅이 뒤지며, 영어 잡지와 책을 구해 읽었다. 56년에 미 대사관에서 전국 교수 중에서 몇 명을 뽑아서 미국에 보내준다고 하였다. 스미스 만트 그랜트 장학금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험 치러 왔는데 내가 제일 어렸다. 영문학 하는 사람 3명을 뽑았는데 장왕록씨, 송욱씨, 그리고 내가 됐었다. 그래서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가서 1년 동안 희극을 공부하게 되었다.

1년이 계약인데, 마치고 돌아 오려니까 미국 무성에서 ‘있고 싶으면 1년 정도 더 있어도 된다.’ 는 편지가 왔다. 그래서 ‘학위를 해야 되겠다.’ 해서 18 과목을 하게 되어 영문과 아홉, 드라마와 아홉을 하고 한국에는 연극학과가 없으니 임시학생으로 드라마 학부 1학년 기초과목을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학교 뮤지컬의 조명도 맡고, 무대에 서기도 하였다. 2년 동안 참 고생 많이 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예일 대학을 나온 극작가 토마스 페터슨 교수가 계셨다. ‘버나드 쇼’ 라는 세미나가 있었는데, 거기에선 대학원 코스에서 세미나 할 때 다른 교수들이 모두 수업에 참가한다. 그 세미나에서 나를 가르치시던 교수님들이 “네가 한국에 돌아가서 희곡 문학을 강의도 하겠지만 먼저 극작가가 되어야 한다.” 하고 자꾸 요청 하셔셔 거부를 못하고 영어로 하는 창작 코스를 택하게 되었다. 수업을 따라 가느라 밤에 울기도 했고 정에 약해 괜히 택했다는 후회도 했다. 그러나, 페더슨 교수 부부는 항상 나를 격려 하여 주었고, 밤늦은 시간에 도서관에서 나와 그 집 문을 두드리면, 잠옷을 입은 채로 반갑게 맞이해 주면서 따뜻한 차 한잔과 함께 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들어 주셨다. 그 때 쓴 두 작품이 미국 학생극 경연대회에 뽑히게 되어서 공연의 기회도 갖게 되었다. ‘캐롤라이나 플레이 메이커스 (Carolina Playmakers)” 라고 그 지역에서는 제일 유명한 극장으로 일종의 신인의 등용무이 되기도 하는 곳이다. 외국인으로서 참 운이 좋은 편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와서는 희곡보다 번역을 많이 했다. 그 때 봉급이 2만원인가 했는데 혼자 살기엔 몰라도 가족들을 부양하기엔 많이 모자른 돈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번역을 하게 되었는데 아마 그 당시에는 내가 번역을 제일 많이 했던 것 같다. 중앙대에서 서강대로 오라고 해서 맥주값을 더 벌긴 했지만 그 때 교수들 생활이 형편 없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면서 돈 버는 방법은 글 쓰는 것 밖에 없겠다는 생각에 내 팔자가 이렇게 되겠구나 해서 쓴 것이 <원고지>였다.

 

 1959년에 <원고지>를 써서, 여석기 선생이 사상계 편집위원으로 계실 때 사상계에 처음 작품을 내면서 문단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가장 부러운 게 교육에서부터 기획, 공연 까지 할 수 있는 바로 상설 극장이었다. 그래서 1959년에 알지도 못하면서 록펠러 재단에 편지를 썼다. 부럽다고, 그리고 한국에도 그런 것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지원해 줄 수 있냐고, 계속 편지를 보내고, 뉴욕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록펠러 사무실에 우두커니 디렉터를 만나려고 기다리기를 몇 차례 했지만, 누가 동양에서 온 가난한 유학생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 하겠는가? 그런데 그 정성이 어떻게 전해졌는지, 록펠러 3세 디렉터가 느닷없이 ‘내가 한국에 가면 누구를 만나야 하나요?’ 하는 전화를 걸어왔다. 그래서 만난 적은 없지만 유치진 선생 밖에는 없을 것 같아서 급히 유선생한테 연락을 했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가면 대우 잘해 달라고. 유선생은 놀래 가지고 그 사람이 공항에 내릴 때 배우들을 다 데리고 가서 꽃다발을 들고 환연하면서 일이 시작되었다, 유선생과 함께 드라마 센터를 만들었는데 내 뜻과는 다르게 되었다. 처음에 공공소유에서, 1년 동안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어느 새 개인 소유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재단에서의 지원 계획과는 편이하게 틀린 결과였다. 록펠러 재단에서는 나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의미에서 인지, 위로를 한다는 의미에서인지, 그 후 나에게 1년의 세계여행을 지원해 주었다.

 

 1969년, 서강대학교로 자리를 옮기 뒤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었다. 사실 요즘 말로 공연 영상 예술학과를 기대하고 옮겼는데, 그것이 교육부에서 허가가 나오지 않아서 신문 방송학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곳에서, 연극, 영화, 창작법, 문화론 등의 강의를 하면서 희곡을 쓰고, 책을 쓰는 작업들을 함께 하였다. 서강대 내의 메리 홀이라는 극장은 당시 가장 좋은 시설의 극장이었는데,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연극이 올라가고, 서강대에서는 연극학과는 없지만, 연극을 생업으로 삼는 많은 인재들을 길러 내었다. 또한, 연극을 했던 학생들이 영화, TV, 광고,신문사 등으로 진출 하였고, 그들은 연극이 그들을 얼마나 잘 훈련시켜 주었는지에 대해서 항상 얘기하곤 한다.

 1986년, 당시 서강대 경제학과를 다니던, 연극을 하던 아들을 사고로 잃었다. 지금도 열심히 연극을 하는 극단 작은 신화를 친구들과 만들어 막 두 번째 공연을 준비 중이었다. 그 후 많은 연극인들이 드나들었던 장위동 집에서 나와 평창동으로 이사를 했다. 내가 웃음을 읽으니, 주위 사람들 특히 제자들이 불편해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것을 마음 속에 묻고 다시 예전처럼 사람들에 묻혀서 지내기로 했다. 내 아들 같고, 내 딸 같은 제자들이 그 빈자리를 지켜주었다.

 

 1994년, 서강대에서 은퇴를 하게 되니, 제자들이 은퇴기념 공연도 해주고, 책도 내주었다. 은퇴를 하게 되어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할 일이 더 많이 늘었다. 작품을 쓰고, 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나고, 여행을 다니고 하는 일들로 나의 시간들은 채워졌다. 언제나 하루 같이 성실하게 가정을 지켜주는 아내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먼저 보냈지만, 언제나 제 부모 일을 먼저 챙겨주고, 수시로 집안을 드나들며, 재잘재잘 웃음꽃을 피워주는 세 딸과 손자 손녀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최근에는 큰애와 작은애가 내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자기들이 사는 동네로 부부를 강제로 이사 시켰다. 조용하고, 한적한 이곳에서 우리 부부는 산책도 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으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

 

 써머셋 모음이 한 얘기인데, ‘항상 좋은 것. 밝은 것만 찾다 가는 안된다.’는 것이다. 온전한 집안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 말 못할 고민이 있는 법이다. 나도 아들을 떠나 보내는 제일 충격적인 일을 당해보았지만, 그럴 때는 그것을 어떻게 수용 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극작도 마찬가지다. 나는 희곡을 쓸 때 비극을 쓴다. 희극을 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희극 속에 비극이 들어있고, 비극 속에 희극이 들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늘 ‘불급불태(不急不怠)’ 라는 말을 써 주었다. 서둘지도 말고 태만 하지도 말라.

 사람들이 쉽게 양심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경험을 통한 양심을 말해야지 경험하지 앉고 말하는 양심의 소리는 중요하지 않다. 살다가 경험을 통해서 보면 양심을 말 못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해가 갈수록 나의 전화번호 수첩이 가벼워진다. 정초에는 으레 수첩의 전화번호를 정리하는데, 나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의 이름이 자꾸 빠져나간다. 빠져 나간 자리에 새 이름이 들어와야 하는데 요즘은 줄면 줄었지 영 새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럭저럭 살다 보면 다른 사람의 전화수첨에서 내 이름도 빠져나갈 것이다. 늙으면 주위에서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아무도 자기를 불러주지 않는다. 호적의 착오로 나이는 나하고 같은데 은퇴한 어떤 친구가 있다. 오랜만에 만났더니 이 친구 하는 말이 “동네에서 동민 위안의 밤을 여는데 많이 모이시오” 하는 확성기 소리도 반갑다는 것이다.

생(生)과 사(死)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운명은 거역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곧 떠나갈 것이라고. 주위를 정리한다고 하는 것도 내겐 맞지 않는 듯하다. 그저 때가 오면, 나도 내 주위의 사람들처럼 조용히 떠날 것이다.

                        -2003년 가을 희곡 작가 이근삼 교수가 병상에 있을때 막내딸 이유정이 <한국희곡>의 요청을 받아서 그동안 발표된 이근삼 본인의 여러편의 글을 정리하여 기고하였다. 

2.어머니의 노래 – 별 삼형제의 합창

<징병돼 당신 곁 떠난 두 아들····· 바느질로 시름 달래며 불러> 

2002년 . 조선일보

​나의 어머니는 26세때 남평과 사별하고 그 긴 긴 세월 홀몸으로 세 아들을 먹이고 입혀야 했다. 어머니는 별들이 총총한 새벽에 집을 나서 밤 늦게 직장서 돌아오셨고, 셋째로 태어난 나는 세상에 눈을 뜨게 될 때까지 어머니의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자랐다. 

 

 어느날 밤, 자고있는 내 얼굴에 무슨 물기가 흐르는 것 같아 눈을 뜨니 어머니의 얼굴이 내 얼굴과 맞닿아 있었다. 어머니가 울고 계셨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숨을 죽였다. 찢어지는 듯한 가난 속에서도 우리 삼형제는 꿀리지 않고 명랑하게 자랐다. 큰 형님은 아버지 구실을 했다. 문학 청년으로 성장한 큰형님(근철)은 창가(노래)도 잘해 학예회에 나가 독창도 자주 했다. 작은 형(근홍)도 ‘집시의 달밤’이니 하는 양곡을 비롯, 당시의 유행가를 제법 흉내냈다. 큰 형은 동생들이 어머니를 찾을 기미가 보이면 자기도 노래를 하고 우리들을 합세케했다. 큰 형은 열댓살 때 스스로 작곡 작사를 해 우리는 심심하면 합창을 했다. 그때의 노래는 아직도 기억에 선명해 어떤 모임에서 노래​를 강요당하면 나는 그 조래를 한다. ‘들국화 핀 언덕에, 송아지 울음 소리. 금물결 천리길에 쫓기는 참새떼들. 아~아~ 서산에 해는지고요, 마을에 연기나네.’ 어머니도 이 노래를 배웠다. 가난 속에서도 가족의 합창이 있었다. 

 

 2차 대전 막바지, 두 형이 징용 징병으로 끌려 나가고 나도 비행장에 동원돼 노동을 하던 시절, 밤이면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시며 이런 노래를 하셨다. 

‘넓은 하늘 먼 곳에/ 별 삼형제/ 반짝 반짝 빛나며/ 노래 부르네…/ 웬일인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 별만 둘이서 눈물 흘리네’

 

 어머니는 우리 삼형제를 별 삼형제로 생각하신 모양이다. 별 셋중 하나가 노래에서처럼 사라지게 됐다. 해방이 되자 나는 학생운동에 말려들어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조망자 신세가 된 것이다. 나는 어머니 곁을 떠나 월남하게 됐다. 1947년 여름 어머니는 나를 해주(海州) 갯벌까지 호송했다.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 금가락지를 주며 힘들면 이걸 팔아 허기를 채우라고 하셨다. 

별들이 반짝이는 새벽 갯벌에서 이별한지 수십년…그 후 어머니가 1984년 북녘땅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후 밤마다 꿈에 나타나던 고향이 영원히 사라졌다. 고향은 어머니였는데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나에게는 고향도 사라졌다. 가난과 고통을 잊고자 노래를 하던 삼형제도 이제 70줄을 훨씬 넘었다. 고약한 불효 자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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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나의 20대 –이근삼

< 샘터 1994년 9월호 >

화려했던 과거, 얼룩진 과거, 또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과거라는 말을 자주한다. 그러나 나의 과거, 특히 20대라는 과거는 이런 표현에 해당되지 않는다. 홀로 남쪽으로 도망해 온 몸이라 무슨 호화스런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좀 고생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큰 비극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때는 너나 할 것 없이 하루 한끼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고 6·25 전쟁 때는 다 같이 사지를 헤매었기 때문에 나와 너의 처지라는 비교심리가 생길 틈이 없었다. 하필 이런 시대에 태어났을까 하는 팔자 타령은 했어도 왜 나만 이 고생일까 하는 한 같은 것은 없었다. 

 주어진 고약한 환경 속에서도 대세가 움직이는 대로 행동했고 나라로부터 이렇다 할 고생의 대가를 받지 못했어도, 사정이 그러니까 하고 별 불평이 없이 지낸 것이 나의 20대 삶이었다. 장학금, 보너스, 퇴직금, 연금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군대 생활 5년을 마치고 알몸으로 사회에 내버려진 것이 우리들이다. 군대에 졸병으로 들어갔다 거지가 되어 나온 것이 나의 20대였다. 전쟁 통에 죽지 않고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이 오히려 고맙게 생각되었다. 

특히 나 같은 피난민은 남한에서의 고생은 공산당 치하의 생활에 비하면 양반이라는 생각이어서 고생 자체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심한 불평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훗날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친구들은 너는 왜정시대에 사범학교에서 노예교육을 받아 복종 밖에 몰라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핀잔을 주었다. 

 두서너 곳에서 과외 수업이다, 가정교사다 하며 간신히 학비를 마련해 대학이라는 곳에 몸을 담았지만 우선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학교 도서관이란 웬만한 책방보다 못했으며 그나마 일본이 망하자 책이 왕창 없어졌다. 

 쇠꼬챙이 같은 연필로 유지(油紙)에 한 권밖에 없는 교과서 글을 꼬박 베껴 등사판으로 밀어 나누어 보곤 했다. 이렇게 복사된 글은 늘 희미해서 수업에 앞서 교수가 원본을 읽어주면 우리는 가필 수정을 하였다. 이 작업이 끝나야 교수의 강의가 시작되는데, 한 시간에 원서 한 페이지쯤 읽고 나면 수업은 끝났다. 간혹 학생 중에 교과서로 쓰는 원서를 구하는 친구가 있으면 우리는 그를 여왕처럼 모셨다. 그 책을 빌려 밤새 베끼고 읽었다. 책은 더러 책방에 나오지만 나에게는 돈이 없었다. 무리해서 고본(古本) 서점에 나온 책을 사면 당분간 점심은 굶어야 했다. 나도 숱하게 책 때문에 점심을 포기했다. 나는 오늘날까지 30여 년간 하루에 두 끼를 먹고 살아왔다. 세끼를 먹으면 괜히 몸이 거북해진다. 아마 옛날 습관의 연장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때는 주로 미국문화원 도서관에 드나들었다. 틈만 있으면 미국문화원에 갔다고 표현하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문화원의 문이 닫힐 무렵이면 황급히 효자동 학생 집으로 달려가 골골하는 배를 움켜쥐고 산수며 국어과목을 가르쳤다. 

 희곡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할 무렵이라 나는 미국문화원에 간청해 유진 오니일(Eugene O’neill)의 희곡집을 빌렸다. 그 책을 빌려온 지 3일 만에 6·25 전쟁이 터졌다. 모두 피난 간다고 법석일 때 나는 빌려온 책을 반납한다고 이틀 뒤 문화원에 갔다. 문화원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모두 피난 간 것이다. 그 책을 들고 다시 집에 돌아왔다. 나는 그처럼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멍청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환도해 보니 나의 몇 권 안되던 책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 희곡집의 행방도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지금 무리를 해서라도 책을 긁어 모으는 습관은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학 3학년 때 6·25 전쟁이 터져 숨어서 사노라 고생도 많이 했다. 숨어 다니기에도 힘들었지만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그때 내가 하루 한끼 무엇을 먹었는가 말하면 요즘 신세대는 믿지 않을 것이다. 서울이 수복되자 나는 군대에 뛰어들어갔다. 애국심이나 반공정신의 발로 때문이 아니라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었다. 졸병으로 들어갔다가 이왕이면 하는 생각에 장교시험을 치렀다. 그 후 5년을 전투 단위부대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육군사관학교로 옮기며 군 복무를 마쳤다. 육사에서는 외국어과로 소속되어 영어를 가르쳤다. 전쟁 중의 군대 생활 역시 피곤하고 고달펐다. 그러나 이 고생 중에서도 나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상관이며 동료들을 자주 만난다. 당시 나의 부대장이었던 강완태 장군, 당시 동료 장교였던 이규식 장군, 배정도 장군, 육사시절 외국어 학과장으로 함께 생도들을 가르쳤던 황찬호 교수, 전 부총리 조순 교수, 서울대 김종운 총장 등과는 고락을 함께한 사이로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교분이 두텁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나이와 학벌을 초월해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자기만 빠져 나가려는 이기주의적인 생각을 나는 그때 군에서 사귄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잔재주 부리는 사람은 기피 대상이었다.

우리의 고생이란 전쟁이 끝나고 군에서 나와도 마찬가지였다. 황폐한 사회에서 우리를 반겨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용케 참고 개미처럼 일했다. 해방 후의 혼돈, 사상 논쟁, 6·25 전쟁, 그리고 황폐한 사회에서 20대에 접어든 우리들은 무척 고생을 했지만 대신 이런 와중에서 우리는 참는 힘을 길렀고 책임이 무엇인가를 실감했고 마음다짐이 풍요로운 외형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비록 만족 치는 못해도 우리는 그나마 오늘날 같은 정도의 사회를 이룩하는데 일조했다는 사실로 자위할 따름이다. 

새 세대는 기성층의 고생담을 싫어한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시대야 어떻든 인내심과 책임감, 그리고 남에 대한 따뜻한 관심은 인간으로서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는 사실을 새 세대도 인정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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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내 문학의 스승을 말한다.

<1992년 5월호 문학사상>

예술적 재능을 꽃 피워 준 스승 – 미국인 선생 패타슨

내가 일생 처음 원고지를 대한 것은 예살 평양 사범학교에 다닐 때였다. 작문시간이라는 것이 있어 원고지 10매 정도에 글을 써내면 일본인 교사가 그 내용과 주제에 대해 평가를 해주는 과목이었다. 그때 우리에게 주어진 글의 제목은 <하늘>, <겨울>, <승리의 길>, <교사의 사명>······· 등으로 기억한다.

 교사는 자주 내가 쓴 글을 골라 급우들에게 읽어주어 나는 비교적 글을 잘 쓰는 학생으로 인정을 받았다. 물론 일본어로 쓴 글이었다. 내가 입학하기 전에는 <조선어>라는 과목이 있어 당시 교사로 계셨던 이순영 선생님이 담당하셨으나 우리들 14기가 입학하자 그 과목이 폐강되어 이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영어를 강의하셨다. 그나마 영어도 2차 대전 말기에는 없어지고 말았다. 하기야 그 후로는 모든 강의가 전폐되고 우리는 비행장에서 일년 내내 노동을 하다 해방을 맞았다.

 우리말을 모르는 상태에서 해방을 맞으니 처음 대하는 우리글이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역사를 공부한다고 최남선의 고사통(故事通)을 읽고 이광수, 계용묵, 김말봉 씨의 소설을 읽었지만 낯설기만 했다. 식민정책에서 가장 악랄한 것은 피지배민족의 언어를 말살하는 것인데 우리 세대는 이런 와중에서 자라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상태로 1947년 단신 월남해 혜화 전문에 편입했다. 이때 처음 뵌 분이 양주동 선생님이었는데 그 박식함에 감탄했고 선생님을 통해 우리 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와는 달리 그때 같이 공부하던 급우들 중에는 벌써 시를 쓰고 평론을 써 잡지에 발표하는 사람들이 있어 나는 이런 친구들을 만나면 괜히 열등감을 느꼈다.

나도 영문학을 공부한다, 고학을 한다 하며 바쁘게 지내면서도 수필이다 단편이다 하는 것을 혼자서 써보았지만 이건 글이 아니었다. 이런 가운데 내 친구들 중에는 이미 작가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유현목 형 같은 사람은 영화감독으로 명성을 날렸다.

 혜화전문이 없어지고 대신 동국대학이 생겨 재학생은 무조건 동국대학 2학년에 편입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친구들 중 많은 사람들은 다른 학교로 도망가 버렸다. 세끼 끼니대기도 힘들고, 하루 두서너 개의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던 나 같은 친구들은 잔류파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잔류한 덕분에 좋은 스승들을 만났다. 당시의사제지간은 지금과는 달리 형제지간 같은 관계였다. 교실에서보다는 밖에서 더욱 관계가 돈독했다.

 양주동 선생님을 비롯하여 김기림, 임학수, 조용만, 피천득, 이호근, 백철, 최봉수 선생님 등······· 나는 이 분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신세를 졌다. 스승이 제자를 대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도 배워 나는 지금도 그분들을 본받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분들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었지만 그 교훈 중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든 분들이 창작의 위대함과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학문도 좋지만 가능하면 창작을 하라는 교훈이었다.

 한참 문학 공부에 불이 붙을 무렵 6·25 사변이 터졌다. 나에게는 절망적인 사건이었다. 대학 3학년때 군대에 들어갔다. 영어공부를 좀 한 덕에 통역장교가 되어 그 후 5년 동안 군에서 일을 하다, 1955년에 대위로 예편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군에 있는 동안 책은 많이 읽었다. 미군 고문관을 통해 책도 구했고 질문도 해가며 적지 않은 작품을 읽었다. 3년간은 육사에서 영어 교관을 하며 좋은 선배와 친구들을 만났다. 육사 재직중에는 영국작가 ‘그레암 그린’의 작품이 유행되어 ‘그린’에 심취한 황찬호씨를 중심으로 조순, 김종운 씨들과 함께 ‘그린’의 작품은 거의 다 읽어 보았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운이 좋아 대학 훈도가 되어 나는 주로 영미 소설을 강의하는 한편, 생계를 위해 특히 우리말을 좀 더 공부하기 위해 숱한 번역을 했다. 그때 밤을 새워가며 번역해 낸 책을 지금 다시 보면 창피할 정도의 글이지만 나는 우리 글, 문장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이러는 동안 나는 학문세계에서 말을 바꾸어 타게 되었다. 소설에서 희곡의 길로 급선회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국에서 희곡을 전공한 사람이 드물었다. 그 창피한 시험을 거쳐 미국 장학금을 얻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1957년 애가 다닌 ‘노오스 캐롤라이나’ 대학은 연극에 관한 한 미국서는 자타가 인정하는 좋은 대학이었다. 이 대학서 연극과를 오가며 ‘버나드 쇼’. ‘세익스피어’ 그리고 희랍연극을 훑기 시작했고 공연에도 참여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나의 관심은 희곡문학에 있었고 귀국 후에는 학생들에게 희곡을 강의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버나드 쇼’에 관한 세미나 시간에 우리 대학원과는 달리 담당교수 이외에도 두서너 교수들이 가끔 참석해 토론을 했다. 이들 외래교수 중에 ‘토마스 패타슨’이라는 분이 있었다. 예일대학 출신으로 극작가이기도 했고 연출가로도 이름을 날리던 분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유학생의 수는 적어서 그랬는지 미국 교수들이나 학생들은 우리에게 퍽 친절했다. 패타슨 교수는 가끔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해 저녁도 주고 한국에 대해 묻기도 하였다. 그의 부인도 대학서 강의를 맡고 있었다. 부부는 나의 자취방에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나와 친한 사이가 되었다.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 내가 방학 중에 놀지 못하고 ‘서머 스쿨’에서 공부하느라 수고가 많았다며 패타슨 교수는 나를 저녁에 초대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패타슨 교수는 나에게 새 학기에 자기가 맡은 ‘극작’ 시간에 등록할 생각이 없는 가고 물었다. 나에게는 글을 쓸 소질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극작강의에는 대학원생 대여섯이 모여 작품을 읽고 평하며 학기말에는 희곡 한편을 써내야 하는 코스였다. 내가 듣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늘 영어로 토론을 해야 하며 작품 한편, 그것도 영어로 써야 하니 나 같은 외국학생에게는 망신당하기에 알맞는 과목이었다.

 나는 영어도 그렇고, 나의 유학 목적은 창작이 아니라며 공손하고 미안하게 사양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사양은 했지만 그 부부의 나에 대한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의 집에 자주 들리다 보니 그의 아들 딸 하고도 친구가 됐다. 이럭저럭 한 학기가 또 지나 귀국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국무성에서 편지가 와 일 년 더 공부해 학위를 받고 가도 좋다는 전갈이었다. 알고 보니 과에서 나를 추천 했다는 것이다.

결혼 후 1년 만에 집을 떠나 집이 그립기도 했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 는 없었다. 패타슨 교수는 또다시 극작법 강의를 들어보라고 권했다. 우리는 정에 약한 민족이 돼서 그런지 이번만은 그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부득이 등록을 마치고 첫 강의에 들어갔더니 미국학생들도 나의 만용(?)에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한 학기에 이 강의를 듣노라 온몸의 진을 뺐다. 작품을 쓰노라 밤을 새우는 것은 다반사였다. 쓰다가 아이디어가 고갈되고, 벽에 부딪치면 패타슨 교수를 찾아 조언을 바랐고, 영어에도 한계가 있는지라 머리 속의 내용이 표현이 안될 때는 문장의 지도도 받았다. 이럭저럭 고생 끝에 학기말 숙제를 내니 그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었다.

이때 써낸 작품 운이 좋아 그곳 극장서 공연되었다. 패타슨 교수 부부는 공연 후, 사람들을 불러 나를 위해 파티도 열어주었다. 이 무렵 <초당(草堂)>의 작가 강용열 선생님이 대학에 강연차 오셔 우리를 만났다. 그분은 예일대학 교수로 있다가 창작을 하기 위해 교수직을 던졌다며 고생은 하겠지만 창작을 계속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강 선생님과의 두터운 사이가 계속되어 그의 집에도 가보았고 뉴욕에서도 자주 만났으며 한국서 개최된 PEN 대회 때 그분을 초대하기도 했다.

나는 그 고생스러웠던 경험도 잊은 채, 다음 학기에도 극작법을 수강하고는 작품을 또 한편 써서 그곳 극장서 공연을 했다. 귀국을 앞두고서는 강의와는 관계없이 희랍작가 에이스커러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을 우리의 현대사로 바꾸어 장막극을 썼다. 패타슨 교수는 이 작품을 자기의 것인 양, 성의를 갖고 도와주셨다. 오래 전 국립극장서 공연한 나의 <욕망>이라는 작품은 그때 쓴 영어극을 내가 다시 우리말로 환원한 작품이다.

나는 인생의 새로운 길을 열어준 나의 스승에 다소나마 보답하고자 요로를 통해 패타슨 교수 부부를 1년간 한국에 교환교수로 모셨다. 이제 그 스승은 저승으로 가셨고 부인도 병상에 누워 계신다. 그분은 가끔 이런 말씀을 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예술적 재능이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본인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 교사란 이것을 찾아 키워주는 사명이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글을 쓰기 위해 교수직을 버린 강용열 선생 같은 용기도 없고, 제자의 능력을 발굴, 키워 줄 사명도 망각한 채, 허송세월 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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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마지막 본 어머니

<1990년 8월15일 팔도일보>

 

 

고향을 떠날 때 품 속에 간직한 어머니 황봉덕(黃鳳德)의 초상화

 나는 1947년 8월에 월남했다. 먼동이 트기 전 해주(海州) 바닷가를 포복 하듯이 기어서 손바닥만한 배에 올랐다. 사공은 바닥에 엎드리라고 소리쳤다. 저쪽 멀리 서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직 철없는 막내가 혼자 월남 한다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 어머니는 나를 해주 바닷가까지 배웅한 셈이다. 멀어져 가는 배를 보시던 어머니의 심정은 훗날 내 자신이 애비가 되어 애들을 키워보니 더욱 간절하게 느껴진다. 애들의 귀가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애를 태우던 나였으니 그때 어머니의 심정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는 아버지를 모르고 자라났다. 내가 태어나서 며칠 후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셨다. 자칭 문인이며 신문기자로 가족을 간도(間島)에 끌고가 신문사를 경영도 했고 돌아가시기 전에는 평양서 대동신문 (大同新聞) 일도 보셨다는 것이 내가 아는 아버지에 대한 지식의 전부이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집안의 골칫 덩어리였다고 한다. 하루도 무사한 날 없이 앓기만 해서 세 살을 못 넘기고 죽을 것이라고 집안에서는 체념을 하고 있었단다. 우리나이로 열여덟에 월남하면서도 어머니가 해주까지 나를 배웅한 이유도 나에 관한 한 믿을 수가 없다는 어머니의 근심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도중에 기차간에서 두 서너 번 검문에 걸렸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기가 막힌 연기로 나를 구출해 주셨다. 폐가 나빠 해주 친척집에 요양하러 간다고 했다. 이렇게 허약하고 믿을성 없는 아들을 해주 갯벌에서 혼자 떠나게 했으니 어머니는 오죽이나 괴로웠을까. 약한 애는 집을 떠나 살도록 하라는 옛말도 있듯이 나는 단신 월남해서도 평양사범을 나왔다는 이유로 해서 겹치기 가정교사를 하며 대학에 적을 둘 수 있었다. 그간 살기가 힘들어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며 홀로 울기도 했다. 

 월남해서 석 달쯤 됐을 11월 어느 날 해주서 이별한 어머니가 그야말로 꿈처럼 내 앞에 다시 나타나셨다. 학자금 몇 푼과 속옷 몇 벌을 가지고서. 그렇지 않아도 빼빼 마른 나였지만 어머니 눈에는 내가 환자처럼 보인 모양이다. 공부도 좋지만 몸이 중요하다며 어머니는 한숨 지으셨다. 어머니는 이틀 후 이번에는 거꾸로 월북하시게 되었다. 날씨도 으스스한 어느 날 저녁 우리는 서울역 한 모퉁이에서 개성으로 떠나는 기차를 기다렸다. 장정들도 생명을 걸고 넘어야 할 38선을 어머니는 무슨 재간으로 왕래 하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차를 기다리면서도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행여나 나의 울고 싶은 표정이 어머니를 괴롭힐까 염려해서였다. 어머니 역시 얼굴을 저쪽으로 돌리시고 계셨다. 플랫폼에 들어가시며 어머니는 “몸 조심해라.”라는 말씀을 몇 번이고 하셨다. 나는 그 쉽고 흔한 “안녕히 가세요.”라는 말도 못했다. 

 어머니는 한창 나이에 홀몸이 되어 갖은 고생을 다하시며 세 아들을 키웠다. 전쟁말기에 큰아들은 징용으로, 둘째 아들은 군인으로 빼앗겼다. 해방이 되자 두 아들은 용케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안이 안정될 것 같았으나 이번에는 막내인 내가 문제아가 되어 쫓겨났다. 요즘식으로 나는 운동권 학생으로 몰렸다. 

 6·25 때 군에 뛰어든 이유는 뚜렷했지만 그 중 하나 이유는 평양(고향)에 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는데 나의 꿈은 무산되었다. 헤어진 지 43년이 넘었다. 나는 어머니의 생사도 모르는 불효자식인 채 먼 북녘하늘을 바라본다. 나도 환갑을 넘겼다. 그럼 어머니는….? 

그래도 때가 오겠지 하고 믿어 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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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억세게 산 외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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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삼의  외할머니 배형순 (裵亨淳)

환갑에 접어 든 할머니가 6.25 직전의 삼엄했던 38선을 무려 일곱 번이나 넘어 다녔다고 한다면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무사히38선을 넘어 본 적은 한 번도 없고 매 회 경비병이나 험악한 자연의 장해를 받아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면서 일곱 차례나 38선을 왕래 했다니 늙은이의 담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경비병에게 붙잡혀 끌려 가던 도중에 호소와 설교로 오히려 경비병으로 하여금 할머니를 남한 땅 직전까지 보호하게끔 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무슨 소설책 내용을 보는 듯한 착각도 일으킨다. 도망치다가 강물에 빠져 익사 직전에 우연히 떠 내려온 통나무를 껴안고 간신히 죽음을 모면한 이야기며, 숲 속에 장장 스물 네 시간이나 숨을 죽이고 숨어서 경비병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는 경험담은 무슨 드릴러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남북으로 갈라진 아들 딸들을 위해 평양서 지고 온 보따리를 서울로 서울의 살림감을 평양으로 나르다가 보니 어느덧 70고개가 눈 앞에 다가 왔더라는 할머니.

이 할머니의 이름은 배형순 (裵亨淳) 이라고 했다. 무릇 한국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할머니도 옛날 시집살이를 시작하자 이름 석자와 이별하게 되었다. 그저 여보, 어머니, 할머니라는 막연한 추상 명사를 지니게 되었다. 나의 외할머니다.

 

 할머니는 부지런했다. 일찌기 남편을 잃고도 공수로 오남매를 거뜬히 기르고 모두 당시의 최고 학교까지 보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동리의 닭들보다 먼저 깻고 뒷산의 부엉이보다 밤잠을 안 잤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부지런했다. 할머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늦잠 자는 버릇이었다. 아직 벌겋게 달아 있는 부엌 부지깽이를 흔들며 방에 뛰어들어와 천성으로 아침잠이 많은 손자들을 후들겨 갈기던 일이 엊그제 같다.

낮잠이랑 할머니 눈에는 태만의 상징이었다. ‘사람이 왜 자야 하는가?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열렬한 기독교 신자이었던 할머니지만, 사람이 자야만 하게끔 만든 하나님에게 불평을 하곤 했다. 할머니의 늦잠, 낮잠 거부성의 영향을 받아 그 아들 딸들도 도시 잠이 없다. 등교 시간이 너무 일러 교문 앞에서 서성대기 일쑤였고, 공부하다 보니 아침 닭이 울더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할머니가 그 남편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은 가난 뿐이었다. 이 가난을 이겨 낼 수 있는 할머니의 유일한 무기는 남의 배 이상 일을 한다는 부지런한 성격 뿐이었다. 동아리에서도 <부지런한 할머니> , <부지런한 집>으로 통할 정도였다. ‘그저 부지런해라. 그러면 살 수 있단다.’ 할머니가 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주벽이 임하면서도 가난했던 남편에게 지독히 혼이 나 이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결심한 어린 신부는 달 밝은 밤, 밧줄을 들고 진남포 억양기(鎭南浦 億兩機) 뒷산에 올라갔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숲을 헤치고 한참 올라가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났다. 이 산에는 가끔 범이 나온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러자 겁이 나, 밧줄을 내던지고 밑으로 뛰어 내려왔다는 할머니다. ‘죽으러 간다는 사람이 범이 무서워 도망치다니. 아마 그가 진짜 죽을 생각은 없었나봐. 모든 일은 두 번 생각해야 해. 한번 생각해서 안되는 일도 다음날 자고 나서 또 생각하던 쉽게 풀리는 수가 있어.’ 할머니는 젊었을 때의 산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38선을 넘을 때 해주 근처의 바닷가에서 이복 경비병에게 붙들려 유치장 신세가 되었다. 벙어리를 가장했으나 잠꼬대를 하다 탄로가 나서 벌을 받게 되었다. 환갑이 넘은 할머니더러 김일성이가 만들었다는 조선 노동당의 20개 정강인가 뭔가 하는 것을 빼놓지 말고 암기하라는 처벌이었다. 정강이가 뭔가 하고 물었더니 민족의 영웅인 김일성이가 만든 귀절인데 그대로 지키면 다 잘 살 수 있으니 잔말 말고 외라는 명령이었다. 할머니가 이런 것을 외울 리 없다. 며칠 후 할머니는 책임자들 만나 담판을 했다.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간 모양이다.

할머니: 이건 암만 해도 못 외우겠다. 잘 못 살아도 좋으니 난 외울 수가 없다.

경비병: 그럼 할 수 없소. 유치장에서 떠날 순 없소.

할머니: 다름 것을 외우면 안될까?

경비병: 뭔데?

할머니: 성경구절이나 찬송가라면 얼마든지 외울 수 있다.

귀찮고 가망이 없을 바에야 하는 생각에서 경비병에게 대든 모양이다. 며칠이 또 지났다. 어느 날 밤 젊은 병정이 할머니를 빼돌려 유치장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하도 감사해서 혹시 이남으로 내려오거든 상공부 XX과에 있는 내 아들을 찾아 달라는 인사를 했더니 그 병정이 “할머니 정신 나갔소? 당장 평양으로 돌아가시오!” 라고 했다 한다. 물론 평양으로 되돌아 갈 리가 없었다. 그대로 서울로 와 버렸다. “그 젊은 애가 아마 예수를 믿나 봐.” 할머니가 그 후에 하던 말이다. 이름을 묻지 못해 안됐다고 애석해 하곤 했다.

 

 남편을 일찌기 잃은 할머니는 평양으로 이사해 남산재교회 구역 내의 집을 한칸 빌려 생활을 시작했다. 도둑이 제 집 드나들듯이 들끓는 곳이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떤 겨울 밤, 내일 살림이 당장 근심이 되어 잠을 못 이룬 할머니는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유리창 저쪽에 방안을 들여다 보고 있는 또 하나의 얼굴과 마주쳤다. 할머니는 세차게 문을 열고 “도둑이야!” 하고 소리치면서 용감하게 밖으로 뛰어 나갔다. 마당에 굴러 있는 막대기를 주워 들고 맨발로 도둑의 뒤를 쫓았다. 사람 하나 없는 심야의 추격전이 벌어졌다. 도둑도 두어번 미끄러졌고 할머니도 몇 번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쫓고 쫓기는 전쟁이 벌어졌다. 한참 쫓아 가니까 도둑이 힘에 겨워 씩씩 거리며 멎었다. 할머니도 우뚝 섰다. 

막대기를 흔들면서 숨이 차서 있는 할머니에게 도둑이 소리 질렀다.  “이리와! 죽여버리겠다.”​

할머니는 그제야 상황을 판단하고 뒤돌아서 도망쳤다. 열심히 따르다 보니 오히려 위험 속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군에서 가끔 휴가를 맡아 돌아오면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빨갱이가 도망간다고 좋아서 쫓아 가지만 말고, 적당히 해서 돌아 서도록 해라. 욕심이 너무 많아도 탈이다.”

할머니가 군사령관이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과거의 산 경험을 살려 늘 반성과 자제를 우리들에게 당부하는 것이었다.

 부지런하고 무서움을 모르는 성격의 탓인지는 몰라도 남한테 지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특히 그 많은 손자들이 밖에서 싸움하고 울면서 돌아오면 질색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떤 동리 애한테 얻어 맞고 집에 돌아왔더니 할머니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다시 밖으로 나가 그 애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불의의기습을 해서 단단히 복수를 했다. 회색이 만면해서 집으로 뛰어가 할머니에게 보고를 할 생각으로 골목길을 돌았으나 그 애의 어머니에게 붙잡혔다. 그 자리에서 죽도록 얻어 맞고도 모자라 다시 그 집으로 끌려가 대문 안에서 포로가 되어 다시 두드려 맞았다.​

 지독한 집이라 어린 나에게 집에 돌아가 매맞았다는 소리를 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받은 뒤에야 풀려 나왔다. 서울에서 전문학교까지 나왔다는 인텔리 여성이 이 꼴이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몸이 만신창이였다. 할머니한테는 싸워서 이겼다고 해 두었다. 그러나 옆집 애의 고자질로 마침내 탄로가 되고 말았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안했다. 다음 날 나의 적수의 어머니가 집에 찾아와 할머니 앞에 무릎을 떨어뜨리고 싹싹 빌었다. 할머니는 조용한 표정으로 그 집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부터 그 집 어머니가 친어머니 모시듯 할머니를 자기 집으로 초대도 하고 놀러도 왔다. ​ 무학의 할머니지만 설득력도 대단한 모양이다. 할머니는 그 후로는 그 집의 모든 행사의 고문격이 되었다.

 할머니는 젊은 사람들과 곧 잘 사귀었다. 우리 친구들이 놀러 오면 나는 빼놓고 오히려 할머니를 상대하는 형편이었다. 젊은 측이 술을 마시면 느닷없이 나타나 멋진 설교를 하곤 했다.

 할머니는 결백한 성격을 가져서 그런지 남의 신세를 지기 싫어하고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다. 1.4 후퇴 때 묘한 운명의 장난으로 할머니는 그 추운 겨울날에 홀로 서울에 남게 되었다. 얼마 후 군의 서울 입성의 틈을 타 서울로 튀어 온 가족들은 할머니의 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몸이 퉁퉁 부어 딴 사람처럼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 나무 뿌리도 먹었다. 그러자 이웃 몇몇 사람이 보기가 딱해 동정 식량같은 것을 주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사양했다. 그리고서는 베개를 뜯어 모밀 껍질을 갈아 먹었다. 숱한 베개 안의 모밀 껍질을 아껴 먹어 생명을 이어 갔다는 것이다. “남의 신세를 지기 시작하면 버릇이 되고 넋을 잃게 된다.” 는 것이 할머니의 생각이었다.

 어느 날 손자를 데리고 이웃에 갔다 오는 길에 손자가 사탕을 사내라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기 시작 했다. 할머니는 무일푼이었다. 그러자 길가에 앉아 동냥을 구하고 있던 거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어떻게 이야기가 됐는지 할머니와 이 거지 사이에는 협정이 맺어졌다. 할머니는 거지가 번 돈을 꾸어 손자에게 과자를 사주었다. 다음 날 할머니는 먼 길을 다시 걸어 나와 그 거지에게 원금은 물론 이자로 쌀 반되까지 붙여 물어주었다. 거지가 감사해서 “당신 집에는 아무도 구걸하러 안 가도록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하고 맹세했다는 말이 있다.

 내가 미국에 건너가기 전날 “비행사한테 너무 높이 떠서 가지 말도록 해라.” 던 할머니.

나에게는 다시 없는 인생의 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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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희곡의 공간서 펼친 상상력의 날개

동아일보 1999년 8월21일  <내 인생의 책>

 독서광 장서광이었던 큰형님 덕분에 나는 어려서부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책을 많이 읽었다. 중학 2학년때까지 일본 신초샤(新潮社)에서 34권으로 펴낸 세계문학전집을 거의 다 읽었다.

작품의 가치며 뜻도 모르고 한권 한권 이른바 독파했다는 자기만족이 당시 나의 독서하는 이유였다. 같은 반에 책 많이 읽기로 소문난 친구가 단테의 ‘신곡’을 읽었다기에 질세라 나도 그 책을 읽기로 했다. 읽었다기보다는 읽는 시늉을 했다. 무슨 뜻인지 한 줄도 제대로 이해가 안됐지만 그 친구에게 나도 읽었다고 선언하고 싶었다. 중3 때 루소의 ‘에밀’이 좋아 반 친구들과 어설픈 토론을 하던 일이 기억난다. 숨막혔던 2차대전 말기에 ‘에밀’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중학 4학년 때 해방이 되자 나는 갑자기 문맹이 되었다. 우리 글은 물론 우리 것에 대해서는 백지 상태였다. 식민지 교육이 나를 병신으로 만들었다. 학교에서 목총 들고 도둑질을 일삼는 소련 병사와 대치하는 동안 읽은 책은 최남선의 ‘고사통’과 김말봉의 ‘찔레꽃’. 나에게는 어려웠고 어색한 글이었다.

 47년 월남해서 대학에서 양주동, 김기림, 임학수 선생님들과 가까이 지내며 우리 문학에 다소 눈을 뜨게 되었다. 이 무렵 갑자기 희곡이 좋아져 미국 문화원에 들러 닥치는대로 희곡을 읽었다. 희곡은 독자의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주는 특수한 문학이다. 이때의 습관이 훗날 나를 미국에 가 연극을 공부하게 했고 극작가로 변신케 했다.

 6·25 전쟁 때는 군대에서 5년동안 군량미를 축냈다. 다행히 전선에서 알게 된 한 미군 대위 덕택에 나의 독서는 꾸준히 이어졌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그 대위는 자기가 읽은 책을 다 나에게 물려주었다. 헤밍웨이, 스타인벡의 작품을 다 읽었고 특히 그로부터 소개받은 서머싯 몸의 ‘인간 굴레는 나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자서전적인 이 책은 문장도 좋았고 평범한 인생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명작이다. 나는 지금도 이 작품을 학생들에게 권한다. 이 책을 계기로 몸의 소설은 물론 희곡을 샅샅이 섭력했다.

 나의 경험으로는 방학은 교수나 학생에게 독서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기간이다. 학생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두권있다. 레이먼드 윌리암스의 ‘문화와 사회’와 부르노스키와 마즈리시 공저인 ‘서구지성의 전통’이다. 우리말로 번역됐다. 전자는 문화를 생활양식의 총체와 변화하는 과정으로 파악한 독창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우리 문화를 진단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준다. ‘서구지성의 전통’은 언제 읽어도 재미있다. 쉬운 문장으로 많은 일화를 곁들여 서구 지성의 맥을 잡아준다. 요즘같은 찜통 무더위 속에서는 책 읽을 생각도 못하지만 이런 가운데 나는 역자인 김종덕 교수가 보내준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라는 책을 읽었다. 맥도날드 간이 식품점처럼 조직화 되는 사회에서 나의 존재가 한없이 서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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