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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삼 작가 인터뷰



1. 한국 연극의 미래를 향한 인터뷰

2."연극만큼 인생을 닮은 것도 없지요."

한국연극의 미래를 향한 인터뷰

 – 문화예술 6 / 1994년 6월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발행 

극작가 이근삼의 창작 활동 – 서연호(고려대 교수)

우리 현대연극의 개척자로서 35년동안 60편에 가까운 왕성한 창작활동을 해온 그는 부조리극의 대가인 브레히트를 한국에 맨 처음 소개해 연극의 발전을 모색하는 한편,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영문희곡을 발표했으며 뮤지컬 역시 그의 손에 의해 이땅에 들어왔다. 이처럼 다양하고 실험적인 작품세계를 펼쳐보이는 창작자로서 그는 연극을 ‘무대에 우주를 담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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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호    오랜 세월 선생님의 작품을 관극하면서 언젠가는 선생님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한번 갖고 싶었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우선 감사드립니다. 

이근삼    나 역시 서교수와 이야기하게 된 걸 기쁘게 생각합니다. 

서연호    1960년 1월에 <원고지>가 무대화 된 이후,최근 <이성계의 부동산>에 이르기까지 만 35년 동안 작품활동을 해 오셨는데, 지금까지 쓰신 작품이 몇 편이나 되시는지요?

이근삼    아마 쉰 댓편 될 겁니다. 공연이 된 것이 46편이고, 미발표된 것이 희곡까지 합쳐서 그쯤 됩니다. 

서연호    미국 유학시절에도 작품을 써서 공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노스캐롤라이나 극회에서 공연한 <끝없는 실마리>(1958)라는 작품이라 하셨죠?

이근삼    그것이 한국일보에서 다뤄졌어요. 한국사람이 처음으로 영어로 희곡을 썼다구요. 그리고 이듬해에 공연된 것이 <다리 밑에서>였지요. 

서연호    대학에서 연극을 보셨거나 영향을 받았던 작가나 작품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이근삼    한국에 있을 때는 오닐 같은 미국의 근대 작가들을 주로 접했습니다. 막상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다 보니까 고전으로 가게 되더라구요. 한때는 버나드 쇼오에 심취해서 아주 재미있게 공부를 했지요. 쇼오가 끝나니까 세익스피어를 하게 되고, 돌아올 무렵 한 학기는 희랍극을 썼어요.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거기서 공연된 작품은 두 개지만 쓴 것은 세편이에요 국립극장에서 공연했던 <욕망>(1964)이란 작품은 원래 영어로 쓴거지요. 번역해서 공연 한거죠. 

서연호    듣고 보니, 버나드 쇼오의 작품세계와 선생님 작품과 연결되는 측면이 떠오르네요. 선생님 작품에는 브레히트의 체취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데, 대학원 다닐 때 브레히트는 접하지 않으셨나요?

이근삼    1957년에 미국에 갔을 때는 교수건 학생이건 평론가건 브레히트의 서사극과 부조리 연극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어요. 이 둘을 모르면 대학원 학생들 간에 대화가 안될 정도로 전 미국을 풍미했죠. 마치 2차 대전 후에 실존 문학이 들어와서 유행했던 것 처럼, 이 두 계열이 굉장히 유행했어요. 한국에는 제가 최초로 브레히트를 소개했던 겁니다. <세익스피어와 서사극>이라는 제목으로 영어영문학회지(1962)에 논문을 발표했어요. 귀국해서 미국에서 봤던 <대머리 여가수>를 번역했는데 민중극단이 무대에 올렸죠(1963.11). 미국에 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국에서는 의상에서부터 무대장치, 연출, 조명등 연극의 모든 부분을 망라해서 훑어 봤어요. 그것들이 후에 작품을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서연호    귀국 이후의 작품활동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1960년에 <원고지>가 사상계에 발표됐지요?

이근삼    결혼한 지 한달 만에 아내를 두고 미국엘 간거 였는데, 귀국 비행기에서 내 장례를 생각해 보니까 돌아가면 글이나 쓰고 생활이 아주 단조로울 것 같았어요. 빚도 좀 있었구요. <원고지>는 이런 내 장래상에 대한 일종의 예측을 쓴 작품이었어요. 당시 사상계지의 문학담당이 여석기씨였습니다. 그때 어떤 이들은 내 작품이 표현주의 기법에 잘 맞는다고 하기도 했지요.

서연호    <원고지>는 60년대 우리 연극을 여는 작품이라 생각이 되는데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서양도 그렇듯이 우리도 60년대가 현대연극이 시작되는 시기인데 그 계기가 되는 작품 하나가 이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이어서 <동쪽을 갈망하는 족속들>(1960)을 쓰셨죠?

이근삼    사상계에 발표됐지요. 역시 사실주의 작품이 아니지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인생의 목표를 찾아 동쪽으로 가고 싶은데 서쪽에서 온 무리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물음에, 서쪽으로 가면서도 자꾸 동쪽으로 간다고 말하죠. 무대는 간이역이에요. 인생 자체를 간이역으로 본거죠. 공연 됐습니다. 

서연호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1961), 이 작품에서 선생님의 초기 스타일이 보다 분명해지기 시작해요.

이근삼    4·19 전후해서 쓴 작품이에요. 사상계에서 발표하기로 했는데 ‘이승만 죽으라는 얘기 아닌가’라고 편집회의에서 거부되는 바람에. 당시 조연현씨의 도움으로 현대문학에 발표했어요. 이 작품은 제가 어린 나이에도 이승만 정권에 하도 화가 나서 정치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한 거죠. 영어로도 번역돼 외국에서도 공연되었어요. 

서연호    그 다음으로 <거룩한 직업>(1961)이 발표되었지요?

이근삼    <거룩한 직업>은 5·16 직후 혁명정부가 교포들의 생활상을 젊은이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을 일본에 보내기로 했는데, 문화사절이라고 나보고도 가달라고 해서 가기로 되어있는 전날, 우연히 문공부 차관을 역임한 정병조 선생 댁에 놀러 갔다가 들은 얘기를 소재로 쓴 거에요. 얘긴 즉 김계숙 선생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훔쳐갈게 없으니까 왈, ‘거지 같은 교수’라고 욕을 하고 나갔대요. 아침에는 일본으로 가야 하는데, 밤 10시에 집에 돌아와서 이튿날 새벽 6시까지 끝낸 작품이 바로 이 <거룩한 직업>이에요. 그때 실험극장은 최초로 허규씨 연출로 단막극을 공연해서 성공했죠. 그리고 났더니 장막극도 한편 써달라고 해서 쓴 것이 제 최초의 장막극인 <위대한 실종>(1963)이었어요. 

서연호    60년대 <위대한 실종>은 매우 눈에 띄는 작품이었어요.

이근삼    이 작품은 제가 작품 선집 낼 때 습작이라고 해서 포함도 안 시켰던 작품입니다. 한참 지난 후에 허규씨가 민예극단에서 다시 한번 공연했죠(1975). 지금은 다 돌아가셨지만 당시 연극계 원로들이 이 작품을 아주 불쾌하게 여겼어요. 신성한 극단에서 엉터리 같은 코미디를 한다고, 앞으로 절대 무대에 올리지 못하게 하라고, 문공부에 가서 항의를 했대요. 세대차이인가요? 그때부터 기성 연극계 어느 파벌에도 끼지 않고 가르치면서 틈틈이 희곡만 썼는데, 전통적 한국 리얼리즘 연극 패턴 망치는 놈이라고 미움도 많이 받았어요

서연호    반대로 생각하면 그것이 변화를 가져오는 큰 계기가 된 겁니다. <바다의 낙서>(1963)라는 작품도 있었지요? 

이근삼    그 작품은 숙대에서 공연했어요. 여자들만으로 구성된 연극이죠. 무대에 전부 여자들만 나오는 것도 재미있는 시도였습니다. 

서연호    <멀어지는 기적>(1963)도 단막극이었죠?

이근삼    미국에 가 있는 이효영씨 요청으로 쓴 단막극이었어요. 이일웅, 장욱재등이 데뷔한 연극이죠. 

서연호    <인생 개정안 부결>(1963)이라는 특이한 작품도 있었군요. 

이근삼    국립극장에서 공연한다고 해서 썼지요. 몰리에르의 <가짜 신사>라는 작품을 다분히 의식하고 썼어요. 한국의 갑작스런 상업주의, 돈의 가치가 최고가 되는 현실을 생각하고 썼지요. 정일성씨가 연출했었죠. 

서연호    <미련한 팔자대감>(1965)부터가 극단 가교와 연결되는 작품이죠?

이근삼    당시 낙원동에 카톨릭 구호소라는 곳이 있었는데, 어느 날 단막극으로 계몽극을 하려고 하니 작품을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한달 후에 써줬더니 다음에는 전국 공연을 할 극단을 찾아보래요. 그때 극단 가교가 만들어진 거지요. 장위동 우리 집 안방에서 이승규, 김상령, 박인환, 권성덕 등이 모여서 극단을 만들고, 1년 동안 서울시내에 나타나지 않기로 하고 버스를 개조해서 전국을 순회하며 지방공연을 했지요. 구호소에서 이걸 보고 아주 좋아했어요. 똑 같은 조건으로 두 번 째 연극을 해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퇴비탑의 기적>(1966)을 뮤지컬로 만들었어요. 극단 가교가 서울서 처음 공연한 작품은 <데모스테스의 재판>(1965)이에요. 고 백철 선생이 이 연극을 보고 나서 자기가 본 연극 중 최고로 재미있다고 극찬을 해주었습니다. 

서연호    그 다음이 <제18공화국>(1965)이지요. 작품집에도 나와 있구요. 

이근삼    박정희 정권 들어서고 나니까 답답했어요. 그래서 공화국을 제5로 할까 제2로 할까 하다가 제 18로 했지요. 어차피 공연 못할 테니까 욕 좀 하자고….

서연호    결국 공연은 못하고 말았잖습니까?

이근삼    공연 못하다가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에 중앙대와 서강대에서 무대에 올렸어요. 

서연호    이듬해에 <국물있사옵니다>(1966)가 나오네요.

이근삼    제가 만든 민중극단이 공연한 작품이지요.

서연호    60년대의 대표작으로 흔히 거론됩니다. 

이근삼    30년이 지났는데 공연 빈도가 매우 많아요. 홍콩과 대만에서도 공연됐습니다. 

사연호    우리 연극으로서는 드문 경우입니다. 가장 많이 공연되었습니다. 어떠세요? 개작이나 더 새롭게 써보실 의향은 안 가지고 계십니까?

이근삼    물론 있죠. 지금 보면 그때 내가 그렇게 밖에 못 썼나 싶어요. 그러나 얼마 전에 12명 나오는 연극을 6명으로 줄여서 공연 했는데 다행히도 관객들이 보고 느끼는 정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아요. 동아일보에서 당시 판촉광고를 했는데 ‘국물’이라는 말이 뇌물처럼 여겨진다고 광고물을 떼라는 외압이 들어 갔대요. 동아일보는 장사 잘 될거라고 좋아 했겠죠. <국물있사옵니다>라는 타이틀은 제가 붙인 게 아니에요. 작품 인쇄 들어간 뒤에 민중극단 단원들이 지어준 거에요. 저는 작품 다 써놓고도 타이틀은 잘 못 지어요. 

서연호    다음으로 <몽땅 털어놉시다>(1967)는 가교에서 했지요?

이근삼    이 작품은 주제가 뚜렷하지 않아요. 당시 극단 가교는 유일하게 학사들로 구성된 극단이었어요. 학벌이 아주 높았는데 놀릴 수도 없구해서 도봉산에 놀러 갔던 경험을 써본 거에요. 이 작품이 가교 역사상 관객을 제일 많이 동원했대요. 코미디죠. 

서연호    <실과 바늘의 악장>(19680이라는 작품이 있죠? 

이근삼    제 창작집에는 안들어 있어요. 한 집안의 분위기를 썼는데 양광남씨가 연출하고 박근형씨가 출연했었죠. 

서연호    그리고 <광대들의 축제>(1969)를 가교에서 했잖아요?

이근삼    이 작품 끝나고 나니까 군사독재에 대한 항거라고들 하더라구요. 지방에서도 많이 공연하는 작품이에요. 얼마 전에는 외대 불문과 학생이 번역해서 공연한다고 하더군요. 

서연호    그리고 나온 작품이 <유실물>(1969)이죠. 

이근삼    여석기 선생이 연극평론책 내면서 작품하나 달라고 해서 썼는데 이 작품도 <이성계의 부동산>처럼 현실과 환상에서 방황하는 인간상을 그렸어요. 단막극으로 공연이 잘되는 작품이죠. 

서연호    <국보>(1970)라는 작품도 있지요?

이근삼    이 작품은 서강대 개교 10주년 기념 작품으로 영어로 썼어요. 제 통역장교시절 경험을 풍자해서 쓴 거에요. 이 작품을 제임스 웨이드라는 코리아 타임지 고문이 대서특필했어요.

서연호    <학당골>(1971)이란 작품은 국방부에서 했던가요?

이근삼    군인의 비리와 부정을 폭로한 코미디였지요. 노주현, 조영남, 박근형, 김동훈등 많은 배우들이 출연했어요. 농담으로 대한민국 연극사상 최대의 관객이었다고 말하죠. 전국의 군인이 모두 관객이었으니까요. 군인부정 쓰라고 하니까 열심히 썼죠. 연출은 차범석씨가 했어요.

서연호    선생님 작품 중에 또 공연이 많이 된 게 <유랑극단>(1971)이지요? 오늘날 입장에서 보면 연극의 형식이나 표현 방식이 <유랑극단>에 와서 종전과 변화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요….

이근삼    당시엔 민속극의 수용이란 생각은 전혀 못했구요. 처음에 작품을 쓸 때는 항상 증오의 대상이 있어서 거기에 집중시켜 썼고, 검열의 문제 때문에 힘들었는데 <유랑극단> 쓸 때쯤 되면서부터는 증오의 대상이 희미해지고 글 쓰는 데 겁이 없어졌어요. 뭐든지 쓴다는 자신감이, 만용이 있었죠. 그러다가 TV가 나오게 됐어요. 텔레비전이 연극이 보여주던 모든걸 보여주기 시작했죠. 내 작품은 다들 불안정하고 언밸런스 한 게 좋다고들 했는데 오히려 이때부터 무대는 안정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제는 만용만 갖고는 안되겠다고 느끼기 시작한 거죠.

서연호    그리고 <머리를 팝니다>(1971)라는 작품도 있네요. 

이근삼    뮤지컬이에요. <이 화창한 아침에>(1975), ‘허생전’을 각색한 <이런사람>(1977), <나 어딨소>(1982)등등 뮤지컬도 몇 편 썼어요. 명령에 의해 새마을 연극도 써보구요. 

서연호    그 작품이 <이 화창한 아침에>이지요?

이금삼    <이런 사람>은 참 열심히 했어요. 공연도 서너 번 됐지요. 

서연호    뮤지컬 해보시니까 우리나라 뮤지컬이 어떻다고 생각하세요? 

이근삼    한국 최초로 뮤지컬을 쓴 게 아마 절 겁니다. 뮤지컬은 쓸 때 조직체가 있어야 해요. 대사 쓰는 사람, 가사 쓰는 사람도 따로 있고, 최소한 글 쓰는 사람이 음악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구요. 그런데 우리는 상식뿐이죠. 제 음악 지식이라는 것도 일제시대 평양 사범학교 시절에 배운 것 밖에 없어요. 우리 뮤지컬은 작곡 따로, 노래 따로, 춤 따로, 연기하는 배우 따로, 모두 따로따로 놀아요. 그런데 요즘은 놀라운 게 젊은 배우들이 노래, 연기, 춤 다 잘 하더라구요. 

서연호    가능성이 보인다는 말씀이시죠?

이근삼    제 작품 <꿈 먹고 물마시고>(1981)가 있죠. 뮤지컬의 가사내용이 달라져야 해요. 내 대사도 노래가사에는 안맞는다고 하더군요. 뮤지컬은 유쾌한 장르잖아요. 뮤지컬이 다른 연극에 비해 격이 떨어지고 대중적이고 연기를 잘 못한다는 말은 거짓말 같아요. 한국 뮤지컬의 약점이 연기하다가 음악 나오면 연기를 멈추고 갑자기 춤추고 해서 흐름이 단절되는 거에요. 대사인지 노래인지 모르게 영창(chanting)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렇게 돼야죠.

서연호    <국물있사옵니다>같은 작품은 조금만 손대면 뮤지컬화 할 수 있는 충분한 여지가 있다고 보는데요.

이근삼    <국물있사옵니다>는 몇 년 전에 MBC에서 뮤지컬로 했었죠. 글 한 줄 안 바꾼다고 해서 하라고 한건 데 나준네 보니까 타이틀하고 주인공만 내꺼더라구요. 우리의 창과 판소리의 멋을 이용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요. 

서연호    <율보>(1971)라는 작품이 있었지요?

이근삼    가교에서 했어요. 전국 교회를 순회하며 공연한 단막의 종교극이죠.

서연호    <동물원의 호박꽃>(1971)이란 서정적인 제목의 작품도 있군요.

이근삼    공연이 많이 되는 작품이에요. 최창봉씨가 동아방송 국장으로 있으면서 성우들 연기력 좀 증진시킨다고 동아극단을 창단해서 올린 첫 공연 작품이었어요. 

서연호    그리고 <30일간의 야유회>(1974)가 기억납니다. 연극제 출품작이었죠?

이근삼    이 작품 쓰고 고통 좀 받았어요. 영국의 제임스 베리의 작품과 비슷하다는 말이 돌았거든요. 많이 공연이 되는 작품이에요.

서연호    <일요일의 불청객>(1974)은 실험극장이 공연하였지요?

이근삼    이 작품도 MBC에서 드라마로 만들었어요. 무대에서는 오현경, 김순철이 나왔는데 재미있게 했어요. 

서연호    연극제에 나왔던 극단 가교의 <아벨만의 재판>(1975)은 그 당시 정치상황과 상관성이 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극단 광장이 공연했던 <왜 그러세요>(1976)는 어떤 작품입니까?

이근삼    청탁 받고 쓴건데 가난한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로 부대 변화가 거의 없죠. 영화 배우하고 있는 이영하가 주인공을 했어요. 

서연호    <이상무의 횡재>(1978)는 연극제에 출품된 작품이고 <마네킹의 축제>(1979)는 실험극장에서 올려졌죠?

이근삼    마네킹이 사람이 되는 연극이에요. 책으로는 미발표된 작품이구요. 무대 위의 마네킹이 극적으로 사람으로 변하죠. 내 작품 중 유일하게 비극 분위기가 되는 작품이에요. 

서연호    <요지경>(1980)과 <꿈 먹고 물마시고>(1981) 역시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죠?

이근삼    <요지경>은 심우성씨 이야기를 듣고 쓴 걸 76극단의 기국서씨가 처음 공연하였고, <꿈먹고 물마시고>는 강영걸씨가 만들어서 400회가 넘었지요.

서연호    특이한 사투리 대사 때문에 화제가 되었던 <게사니>(1983) 이야기 좀 해 주시죠. 

이근삼    평양에서 어렸을 때 들은 얘기예요. 임진왜란 때 피난 온 왕이 평양 사람들 앞에서 나가 싸우자고 했는데 백성들은 하나도 협조를 안했데요. 사람들은 도대체 왕이 왜 저러나 그러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었는데 실제로 자료를 찾아보니 그렇더라구요. 이 이야기를 가지고 가공의 인물과 집안을 만들어서 전쟁 속에 휘말리는 가정의 이야기를 써보았습니다. 나도 지금 사투리를 조금 쓰지만 그때 사투리를 모으느라 고생 많이 했어요. 책도 뒤져보구 노인들도 찾아다니구요. 원래 저는 제 작품 속에 사투리를 거의 쓰지 않았어요. 아마 이 작품이 유일할 겁니다. 

서연호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내일, 그리고 또 내일>(1985)은 어떻게 만든 것입니까?

이근삼    연극이라는 게 인간사회의 관계만을 그리는 게 아니라 무대에 우주를 담는 거라고 생각해요.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무대에 담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죽은 사람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자기 집에 찾아와 보면 어떨까 생각해 볼 수 있지요. 그래서 한 번 써봤죠. 허규씨가 연출했어요. 진주에서도 예술회관 개관 작품으로 올렸죠. 

서연호    1988년도 민예극장에서 마로니에 소극장을 새로 만들 떄 단막극 <거지와 학자>, <낚시터 전쟁>이 공연되었고, 최근에 <막차탄 동기동창>(1991)이 공연되었습니다. 모두 재미있는 공연이었습니다. 

이근삼    극단에서는 관객을 끈다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목이 바뀌었습니다. 난 <원수들 막차서 만나다>가 더 좋은 것 같은데…. 요즘 TK다 PK다 해서 동창 정치인이 많잖아요. 듣기 너무 안좋아요. 이비지도 좋지 않구요. 

서연호    <이성계의 부동산>은 어떤 작품입니까?

이근삼    현실과 상상을 왔다갔다 하는 것을 역사를 빌어 표현한 것이지요. 아마 내가 늙었다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서연호    그간에 발표하신 작품을 개략적으로 회고해 주셨는데 자작이라 하더라도 아쉽게 생각한다거나 특별히 애착이 간다거나 하는 작품은 어떤 건지요?

이근삼    내가 스물아홉 때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 쓴 작품들, 그러니까 그물아홉, 서른살에 순수한 마음으로 썼던 작품들, <원고지>, <거룩한 직업>같은 작품들이 애착이 많이가요. 10대에 집 나와서 얻은 아들처럼 애정이 깊어요. <국물있사옵니다>,<유랑극단>,<꿈 먹고 물 마시고>,<30일간의 야유회>같은 작품들이 역시 애정이 가구요. 

서연호    평소에 선생님의 작품을 대하면서 형식이 다양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형식을 의식하면서 창작하는 것은 아닌지요?

이근삼    저는 글 쓸 때 형식을 먼저 생각하지 않아요. 아이디어 하나 가지고 주제와 스토리를 생각하고 나면 형식이 나와요. 브레히트나 오닐도 그렇고 자연주의부터 쓰고 다음엔 어떤 방식으로 쓰고 하는 싸이클이 있잖아요. 그것도 좋겠지만 형식에 구애받고 쓰지는 않아요. 내가 편리한대로 써요. 그러니까 형식 먼저 생각하고 글과 내용을 끼워 맞추지는 않지요. 앞으로도 내가 어떤 형식으로 써나갈지는 모르겠어요. 후세에 내 작품에 가치가 있다면 형식에 대해서도 연구가 되겠지만 지금 앞으로의 형식을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서연호    말씀 잘 들었습니다. 올 가을이면 대학교수직도 정년을 맞게 되시니 앞으로 더욱 왕성한 창작활동이 이루어지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35년 동안 우리 현대 연극을 개척하시고 모범적인 창작 활동을 해오셨으며, 대학교육을 통해 유능한 제자들을 많이 길러내신 공로에 대하여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연극만큼 인생을 닮은 것도 없지요.” 

 <뵙고 싶었습니다-서강대 이근삼 교수>

– 1992년 9월호 –인재제일  

- 인터뷰 : 홍선경

우리의 삶이 해를 더해가는 동안에도 결코 지리하지 않은 것은, 아니 오히려 윤기가 흘러 반짝이는 것은 아마도 ‘만남’이란 것이 삶 속에서 삶과 함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

그런 만남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 부모와 자식간의 만남, 스승과 제자와의 만남, 연인과의 만남, 동료와의 만남 등이 모두 한결같이 귀하고 소중하지만, 그 중에서도 ‘뜻밖의 만남’ 만큼 신선하고 즐거운 만남도 없으리라. 

 이근삼 교수와의 ‘뜻밖의 만남’의 날짜가 정해지면서 나는 만남에 대한 기대로 내내 가슴 설레였다. 한국 연극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 간의 수상자들 가운데 가장 젊은(?) 나이로 올해 예술원상을 수상하신다는 이근삼 교수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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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우화극의 한 형태를 제시하며, 최근에 이르기까지 40여 편이 넘는 희곡을 쓰고, 연극에 관한 저서 및 번역서들을 남기면서 일생 동안 연극과 함께한 그에게 연극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이근삼 교수는 악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해서 죄송해하는 우리를 안심시키고 편안하게 대해주었다. 저명한 인사와의 만남으로 인해 생긴 가슴 떨림은 순식간에 사그러 들었다. 그 분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곳은 서강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학장실이었다. 큰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학장실의 분위기를 밝고 따스하게 만들고 있었다. 주변의 여러 소품들을 통해 그만의 세계를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추스리며 그와 마주하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배구선수 생활을 하며 다진 체력으로 이제껏 특별한 건강관리는 하지 않는다고 하신 만큼, 훤칠한 키와 연세에 비해 정정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평생을 연극과 함께 해오셨는데, 과연 연극이 갖는 매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허허, 그 얘길 하려면 밤을 꼬박 새워도 부족하지…”

 나의 질문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전문적인 연극인은 물론이거니와 한번이라도 연극을 해본 사람, 또 연극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런 대답을 했을 것이다. 

“흔히들 인생은 연극이고, 스스로를 일컬어 연극배우라고 하잖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음악, 미술, 문학등 많은 예술장르들이 우리네 인생을 표현하고 있긴 합니다만 연극만큼 인생과 꼭 닮은 것은 없는 듯합니다. 막이 오르고 생의 희로애락을 연기로 표현하며, 갈등하고 고민합니다. 그리고 연극이 끝나고 나면 말할 수 없는 허탈감에 빠져들고… 어떻습니까. 이렇듯 연극은 있는 그대로의 인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연극은 특수한 예술이지요.”

 연극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확인하고 나서 직접 무대에 서 본 적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미국 유학 시절에 직접 연기를 해 본 적은 있습니다. 우리나라와는 달라서 희곡을 쓰는 사람도 연극과 관련된 모든 것 이를 테면 무대장치, 조명, 분장 등등 이런 것들을 필수로 공부해야 했기 때문에 연기도 잠깐 해보았지만….나는 영….안되더군요. 허허…”

자못 쑥스러운 듯 대답하시고도 한마디 더 덧붙이셨다. 

“나야 비록 소질이 없어서 그렇다 치지만, 진짜 연극의 맛을 알려면 배우가 되어야 합니다.”

 참고로 소개하면 연극이나 방송에서 소위 ‘일류’로 불리우는 김혜자, 박인환, 반효정, 최주봉, 그리고 얼마 전 아깝게도 운명을 달리한 추송웅씨 등이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 모두 연극에서 오랜 활동을 하면서 연기력을 다져온 덕택으로 어떤 역을 맡겨도 소화낼 수 있는 오늘의 연기인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근삼이라는 이름 석자가 다시 한 번 또렷이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고, 가장 기초적인 궁금증이 떠올랐다.  과연 그의 연극사랑은 언제 어떻게 해서 시작됐을까?

“제가 태어난 곳이 평양인데, 당시 그곳이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곳이어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가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교회에서는 보통 ‘성극’이라 하여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추수감사절에 연극을 하지 않습니까? 그때부터 였던 것 같습니다. 어린 저에게 그 연극이란 것은 마냥 신기했고 그것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

 그는 192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 사범학교를 다니던 중 학생운동을 하다가 중퇴를 하고 1974년 홀로 이남으로 내려와 동국대학교 전신인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년 만에 6·25가 발발하게 되자, 육군사관학교 외국어 교관으로 당시 육사 11기생들을 지도했다. 제대 후 26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동국대학교 전임강사를 지냈는데, 그때는 미국소설을 가르쳤다고 한다. 우리나라 현대 연극사에 굵직한 선을 긋고 잇는 그가 영문과 강사였다는 사실이 조금은 의외였다. 물론 앞서 말한대로 연극에 대한 관심은 그가 어려서부터 꾸준히 지녀온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1957년 그는 스미스먼트 그랜트 장학금으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오늘날 희곡 작가로서의 그를 있게 해준 스승을 만나게 된다. 

그는 스승인 패터슨 교수의 권유로 희곡을 공부하게 된다. 처음엔 희곡이 낯선 장르인데다 언어 문제등을 이유로 마다하였으나, 패터슨 교수의 끈질긴 강요로 어렵게 희곡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비록 스승의 권유와 강요로 희곡을 쓰게 되었지만 그것은 곧 그의 천직이 되었다. 

그의 스승에 대한 자랑은 대단했다. 

“그 분은 나의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해 내시고 그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저도 지금은 스승의 위치에 있습니다만, 스승의 할 일은 지식을 전달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서 잠자고 있는 것들, 그들 개개인만의 소질과 능력을 끄집어내어 일깨워주고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 무릇 스승의 도리인 것이죠.”

그런 훌륭한 스승의 영향을 받아 그 역시 제자들에게 있어 길잡이가 되려고 노력하며 아직도 바쁜 가운데 제자들과의 접촉을 많이 갖는다. 

물론 옛날과는 달리 학생들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에, 학생들과의 만남이 결코 쉽지 안겠지만, 그래도 계속 노력하고 계신 것 같았다. 

 

 이근삼 교수에게는 1958년 미국에서 데뷔 공연을 할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작품을 영어로 써야 했기 때문에 힘들기도 했고, 한국을 극의 소재로 삼은 외국공연인 점 때문에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곳에서의 반응은 의외로 썩 괜찮은 편이었다. 당시 미국인들에게 한국은 신기한 동양의 나라였다. 배우들은 물론 미국인이었는데 ‘3등 국민이 쓴 작품을 1등 국민이 연기하고 있는 것’을 보며 묘한 희열감을 느끼기도 했다. 

 1960년 두 번째 작품을 원각사에 올리면서 한국 연극에 데뷔한 이후 그가 즐겨 다루는 주제들을 보면 정치와 권력의 부패, 지식인의 타락, 건전한 사회 윤리의 붕괴, 꿈의 상실, 애정관의 세속화, 사회제도의 박제화, 인간적인 멋과 여유 상실, 인간성의 상실과 진보 보수의 혼재등 그때그때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풍자하는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별히 그러한 주제를 다루게 된 의도 내지 동기는 어디에 있을까 몹시 궁금했지만 이근삼 교수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성격 탓 이라는 것이었다. 

대답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무척 소탈하고 수줍음이 많다. 그의 연극은 암울한 시대상시대상부터 탈출구를 찾는 작업이었다. 

그는 음악에 대한 관심도 크다. 한국 최초로 뮤지컬 ‘꿈 먹고 물 마시고’를 공연한 이후 뮤지컬 작품을 즐겨 쓰며, 연극에 음악적인 요소를 많이 가미시켜왔다. 그의 작품들은 또 대체로 시대를 초월하여 여러 번 재공연되는 작품들이 많은 것이 특색인데, 자신은 첫 공연 외에 재공연하는 작품 공연은 거의 가보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이를 ‘자신의 소심함’이라 표현하며 말을 잇는다. 

“작품이란 것이 일단 작가로부터 떠나면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니므로 그것이 어떻게 평가되고 해석되는가 괘념치 말아야 하다는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그게 잘 안됩니다. 내 작품이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왜곡되거나 변형된 것을 보면 불편한 맘이 듭니다. 그래서 리바이벌 공연은 가지 않는 것이구요.” 

 그의 작품들이 여러 번 재공연됨에 따라 너무나 친숙해진 탓에서인지 그를 이미 오래 전의 인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다. 7,8년 전 부산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부산에서 내 작품을 공연 한다길래 가보니 11개 공연 작품 가운데 7개가 내 작품이었죠. 그래서 이 작품을 쓴 작가에 대해 물었더니, 글쎄 ‘아 그 분은 돌아가신 지 벌써 오래 되셨는걸요.’ 하는게 아닙니까?”

한편으로는 1960년대에 당시 사회를 풍자하는 내용의 ‘국물 있사옵니다’와 같은 작품들이 1990년대에 이르러서도 여러 번 공연되는 것을 보고, 시간이 흘러도 사람이나 사회의 모습들이 그대로 머물러 있음을 안타까와했다. 

 연극은 한 사회의 생활양식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지금 서구 문화의 유입을 분별없이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혼돈 상태에 놓여있다. 이런 사회현상을 반영하듯 우리 연극은 지금 비틀거리고 있다. 한마디로 한 시대를 특징지을 만한 큰 조류가 없다. 그러나 이근삼 교수 같은 연극인이 있는 한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도 있으리라. 

한국연극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이근삼 교수는 염려의 말을 들려주었다. 

“연극이란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자리잡기 위해서는 6개월 이상의 장기 공연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 연극이 무르익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럴만한 공연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연극이 만년 아마추어로 밖에 머물지 못하는 이유도 다 이때문 입니다.”

우리 연극이 프로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그가 지적한 대로 국가적 지원과 기업차원의 투자가 절실히 요청된다. 외국의 경우 공연장을 제공하는 기업에겐 그에 상당하는 만큼의 세금 감면 혜택을 부여하는 등의 국가적 지원이 따르고 있어 연극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사실을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근삼 교수는 쓰고 있는 글들을 마무리 짓고 그 동안의 작품들을 한데 모아 정리할 계획이다. 한 개인의 노력과 더불어 연극계 전체의 노력이 함께 할 때 한국 연극계는 결코 어둡지 않으리라.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나는 이근삼 교수의 수줍음을 여러 번 보았다. 처음엔 대부분의 연극인들에게서 볼 수 잇는 정열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의외였으나, 이내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줄곧 반짝이던 눈을 나는 기억한다. 그의 연극사랑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사그러들지 않고 살아 숨쉬고 있음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의 이 같은 정열과 순수가 (가슴이 뜨거운 사람일수록 순수할 수 있다는 것을 그를 통해 깨달았다) 마냥 부럽기도 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캠퍼스를 걸어 내려오는 동안 방금 전 그가 했던 말이 귓전에서 떠나질 않았다. 

“연극의 매력? 허허….그에 대해 얘길 하자면 밤을 꼬박 새워도 부족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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