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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리 연극이 안고 있는 문제

 오늘도 서울에서는 대학로를 비롯 각처에서 수십편의 연극이 공연되고 있다. 80년 중반에만 해도 공인된 극단은 10개 정도에 불과했으나 민주화 여세에 힘입어 극단 수는 우후죽순 격으로 불어나 지금은 연극인 수 보다 극단이 더 많다는 비웃음이생길 정도로 극단의 수는 넘쳐흐른다.따라서 공연의 빈도수가 기하급수로 늘어난다. 대학로 근처에 20여 개의 소극장이 생겼다고 하지만 극단의 수에 비해 공연장은 여전히 모자라 각 극단은 공연장 찾기 에 혈안이 되어 뛰어다닌다. 공연장을 잡았다 해도 그 대여기관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주일, 길어 보았자 열흘을 넘지 못한다. 대극장 대여는 더욱 힘들다. 이 짧은 기간에 극단이 투자한 돈을 건진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인들은 지금도 이런 고된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연극을 하는 사람들만이 아는 연극이 갖는 마력 때문이다. 연극의 대형화를 부르짖는 측에서는 기업체나 언론사의 후원으로 뮤지컬이나 대중적 취향에 맞는 극을 대극장에서 공연하지만 아직도 이익을 내기 힘들고, 성공을 했다 해도 관객의 취향에 지나치게 아부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가 없다.


 극단의 수가 많고 공연이 끊임없이 계속되다 보니 자연 작품 내용이 다변화될 수 밖에 없다. 좋게 말하면 공연의 다양성(多樣性)이다. 무릇 예술표현은 자유스러워야 하고 다양해야 한다. 연극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그러나 연극이 이렇다 할 목적이 없는 잡다한 내용일 때 우리는 이것을 다양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연극의 다양한 표현은 상상력을 키우고 실험성도 가미하여 결국 우리의 연극을 살찌게 하지만 관객의 호기심만 자극하고 상업성만 노리기 위한 잡다한 공연은 관객을 혼동케 할 뿐이다. 오죽하면 외설연극이 등장해 법정에까지 비화했겠는가. 어떤 사람은 이런 중구난방식의 계획성 없는 공연의 원인을 창작극의 빈곤에서 찾는다. 협회에 등록된 극작가가 5,60명을 넘는데 뭣들 하고 있느냐는 질책이다. 극작가들의 분발도 요청되지만 극단이 창작극을 기피하는 고질적 태도도 알아야 한다.


 연극은 역사적으로 한 사회를 종합적으로 표현하고 한 시대의 의식과 행동을 통합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리스 연극은 그리스 정신의 종합적 표현이며 그 극장은 종교적 의식과 전체 시민이 모여 공동유대 의식을 공감하는 생동하는 모임터였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그 기하학적 극장은 당시의 질서의식을 단적으로 표현한 장소였다. 우리의 마당극은 연기자와 관객 간의 분계선이 없는 자유분방한 텅 빈 장소에서 실연되었다. 이렇듯 연극의 내용과 공연장소는 한 민족의 시대와 사회를 가장 효과 있게 표현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연극이며 연극 장소에는 이런 고유의 특징이 없다. 우리의 현실이 혼돈스럽고 무질서하여 부득이 하다고 단정하면 그만이겠지만 이대로 방치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들 개인이나 사회가 할 일 그리고 생각할 일은 너무나 많고 중대하다. 통일, 환경문제, 무너져 가는 전통윤리, 교육, 깨끗한 정치, 한국인의 긍지 등 당장 시급한문제가 산적해 있는데도 우리의 연극은 이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밖으로는 화려하게 보이지만 우리 연극이 안고 있는 문제는 너무나 많다. 왜소해지는 공연, 젊은 여성으로만 채워지는 관객석, 논쟁 없는 분위기, 만년 아마추어리즘에 안주하고 있는 극단, 대학로, 즉 문화의 거리가 향락과 타락의 늪에 빠져드는 현실, 부실한 대학 연극교육 등 우리가 해결할 문제는 산적해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연극계의 지적빈곤증(知的貧困症)이다. 예술과 학력, 지식과 예술 간에는 별 연관성이 없다고 하지만 지성 또는 지식은 연극의 질적 향상을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지적수혈(知的輸血)을 할 사람들은 바로 대학에서 연극이나 희곡을 담당하는 교수들의 몫이다. 서울의 경우이겠지만 아쉽게도 현장 작업을 하는 연극인들과 교육기관의 연극 전공자 간에는 깊은 골이 파져 있다. 협조는 커녕 반목(反目)의 인상마저 준다. 새로운 이론과 역사, 객관적 판단을 기피하는연극인도 문제이지만 연극이나 희곡을 지식과 상식으로만 대하여 대학에 안주하는 사람들도 문제인 것이다. 연극은 행동하고 집단성을 강조하는 예술이다. 행동하고 생각하며 미래를 그리는 연극을 위해 양쪽의 협동 작업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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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뛰는 사람들

 시내의 번화가를 걸을 때마다 느낀다. 모든 사람의 발걸음이 몹시 빠르고 바쁘다. 어디에 무엇하러 가는지는 몰라도 거의 뛰다싶이 걷는다. 이러한 풍경 속에서 나만이 소걸음을 할 수가 없어 나도 빨리 걸어야 한다.

 가끔 지팡이를 들고 창경원 담 곁을 천천히 걷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의아한 생각이 든다. 요새가 어느 때라고 저렇게 한가하게, 하는 의심이 간다. 밤거리를 비춰주는 네온 사인도 정지되어 있는 것은 우리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바쁘게 움직이는 네온 사인에만 눈이 간다. 합승을 타도 그 안에서 왔다 갔다 해봐야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질 정도다.  세상이 참 바빠졌다. 모든 일을 빨리빨리 해치워야 일을 한 것 같다. 단시일 내에 빨리 돈을 벌고 빨리 출세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본능처럼 되어버린 것 같다. [서서히] 또는 [여유있게] 라는 말은 패자의 넋두리처럼 들린다.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서서히 그리고 여유있게 일하던 우리의 조상들의 시대와 한가지 점에선 별 차이가 없다. 우리의 인생은 여전히 제한되어 있고 짧다는 사실이다.

 동방에 덕망이 높은 왕이 있었다. 바쁜일을 집행하면서도 인생의 참뜻을 알고 싶어했다. 왕은 이름난 철인 을 불러 인생의 의미를 서술하라고 명령했다. 처린은20년 걸려 50권의 책 속에 인생을 논하였다.

 그러나 왕은 바쁜 몸이라 50권이 너무 과했다. 철인은10년 걸러 이를 10권으로 압축했다. 왕은 이미 늙었다. 다 읽을 기력이 없으니 다시 축소하라고 했다. 5년 걸려 한 권으로 인생을 기술했다. 책을 들고 철인이 나타나자 왕은 임종의 찰나에 있었다. 왕이 한마디로 압축해서 이렇게 말했다. [태어났다, 고생했다, 그리고 죽었다.] 왕은 머리를 끄덕이며 죽어갔다.

우화같은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소용돌이 속에 말려들다보면 이와같은 가장 평범한 진리도 잊는 수가 많다.

 너무 빨리 돈을 벌고 너무 빨리 별을 달고 너무 빨리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은 그만큼 빨리 사라진다. 요 사이는 바쁘다는 말이면 무엇이든 통한다. 약속도 가정의 평화도 이 바쁘다는 말이면 무엇이든 통한다. 약속도 가정의 평화도 이 바쁘다는 말 앞에선 무색해진다. 뛰어가건 걸어가건 어차피 갈 길은 가는데 왜 충혈된 눈으로 바쁘게 빨리 뛰려고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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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호 인

 인생이란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고된 과정이라고 한탄한 버나드 쇼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살다보면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생겨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게 되고 남으로 부터 싫은 소리를 듣게 된다. 남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남의 일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다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경험은 그것이 거의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참는 것이 상책의 길이라고 결심을 하고서도 인간들의 노는 꼴이 구역질 난다고 뇌까진 햄릿의 경우도 무관심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확실히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나면 겸언쩍고 싫은 소리를 들으면 몹시 불쾌하다. 그러나 이 싫은 말을 하고 듣는다는  것은 서로가 관심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싫은 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가끔 회의 썩상에서 싫은 소리를 듣게 되는데 이런 경우 상대방에게 미움을 받게 되는 수가 많다, 그러나 싫은 소리가 두렵고 귀찮아 꼭 나와야 할 자리인데 적당한 핑계로 나타나지 않는다는지 결정 단계에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피하는 무리들 보다는 당장 죽일 듯이 싸우는 사람들이 더욱 바람직 하며 사회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진다,

 우리 주위에는 호인이 더러 있다, 싫은 소리를 않고 항상 미소를 던지는 이 호인형들은 교양의 극치경에 이른 듯한 인상을 준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않고 자기의 의견은 말하지 않고 절대 반대를 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교양있는 거동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양쪽이 팽팽하게 맞선 상태에서 호인은 자주 발탁되지만 정력적인 일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결국 호인이란 모든 사람에 대해 똑같이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 존재가 확인되는 것이 상례이니 남을 위해 분골쇄신 한다는 일은 상상할 수가 없다.

 

 친한 친구란 서로 관심이 있는 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싫은 소리도 한다. 한 사회며 단체에 애착이 있고 관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 싫은 소리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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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 기

 국민학교 아동들이 방학중에는 숙제로 일기를 쓰고 있다. 개학 때는 학교에 갖고 가서 검열을 받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등학교 학생들도 일기를 써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일기의 내용은 보나마나다. 선생한테 검열을 받는다는 전체 아래 쓰기 때문에 그 내용은 항상 건설적이요. 부모를 존경하고 1일1선을 목표로 한다는 것일 게다. 다시 말하면 학생들은 자길ㄹ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선생을 위해서 쓴다.

 학교의 숙제가 아니라도 혼자 쓰는 일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부모에게 또는 동생들 한테 그 내용이 알려질 것이라는 체념하에 쓰기 때문에 진실이 결핍된다. 명사들의 일기 쓰는 습관도 의심스럽다. 언젠가는 자기의 일기가 세상에 알려질 것이라는 의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항상 애국애족에 불타고 정의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문귀로 가득 차는 수가 많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멀쩡하게 살아 있으면서도 일기를 공개 하기도 한다. 그 내용은 보나마나 거룩할 것이다. 그러나 내용이 거룩하다는 것과 사람들이 자기를 거룩하게 생각한다는 것과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남의 감시를 의식하며 글을 쓰는 버릇이 생겼다. 창작을 해도 그렇고 논문. 수필을 써도 그렇고 관객이나 독자들을 의식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위에 있는 몇몇 사람의 감시와 평가를 예쌍하며 쓰는 버릇이 생겼다. 사실 이러한 몇몇 주위의 동업자나 동료가 우리에게 생활비를 대주는 것도 아니요, 우리의 장래를 축복해주는 것도 아니다. 자기가 참말로 하고 싶은 말. 또는 대중에게 던지고 싶은 말이 있으면서도, 가까운 한두 사람의 얼굴이 머리에 떠올라 글의 방향을 이상한 곳으로 돌린다. 그러고서는 내 진심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이상한 변명을 되풀이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의 사회는 자기 할 일은 못하면서도 남의 말이나 행동에는 필요 이상의 신경을 쓰는 습관이 있다. 식당이나 술집에 들어가도 옆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 결국 특정한 몇몇 사람의 비판을 의식하며 할말을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붓을 돌리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항시 나의 글을, 그리고 행동을 감시하고 있으니 일반 독자 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을 만족 시켜야한다는 강박 관념 하에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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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 업

 네 살 짜리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나에게 "오늘은 돈 얼마 벌어왔어?" 하고 묻곤 한다. 습관상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주머니에 들어있는 모든 잡동사니를 꺼내 책상 위에 놓을 때면, 네 살짜리 아들은 유심히 돈 부스러미를 점검한다. 10원짜리가 한두장 나오면 "오늘은 10원 밖에 못 벌어왔어?" 하고 되묻는다. 아침에 출근하려면 가끔은 "돈 많이 벌어와" 하고 격려(?) 한다. 대학 훈도의 아들 치고서는 지나치게 돈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내 아내가 일부러 시키는 것 같지도 않다. 요새 애들은 다 그런가 하고 혼자 생각해보기도 한다.

 얼마 전 나는 네 살 짜리ㅇ 아들과 심각한 대화를 교환했다. 아버지 호주머니 에서 나오는 돈이 늘 10원짜리 뿐이니 아버지의 권위를 의심한 모양이어서, 10원짜리를 갖고 언제 차를 살 수 있는가 묻는 거시었다. 너도 빨리 커서 돈을 벌면 되지 않는가 했더니 "돈은 어떻게 버는 거야?" 하고 되물었다. 일생 이렇게 힘든 질문은 받아 본 적이 없다. 사실 4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아직도 모르는 것이 아들이 질문한 바로 그 내용이다.

 "그저... 열심히 일하면 돼" 하고 우물쭈물 넘겨버리려고 했더니 "열심히 일하는 게 뭐야?" 하고 다가선다. "TV에서 슈퍼맨을 할 시간이다 어서 가 봐라" 하고 방에서 쫒아버리고 말았다.

 대학선생도 봉급을 받으니까 그것이 곧 돈을 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봉급을 받는다는 것은 일정한 위로금을 받는다는 정도요, 돈을 번다는 것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사실 직장에선 받는 봉급이라는 것은 가족의 입에 풀칠을 한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돈을 번다는 말은 식구를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금액을 얻어온다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끔 희곡이라는 것도 쓰고 잡문 비슷한 것을 써서 원고료라는 것들을 받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가족의 입을 휴식상태에서 떨어뜨리지 않기 위한 작업에 소용 될 정도다. 돈을 번다는 것은 아마도 사업이라는 것을 통해 가족의 입하고는 관계없이 돈을 긁어 모으는 것을 두고 말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사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우리들이 돈을 모은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리가 없다. 사업이란 말에는 모험. 야심. 그리고 위험이라는 그림자가 따르게 마련인 것 같다. 아마도 우리 같은 사람이 사업이라는 성곽에서 추방 된 상태에 있고 구태여 접근 할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최대 원인은 사업이 내포하고 있는 그 위험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끔 사업가가 법망에 걸렸다든가 자살을 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으면 사업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즉 돈을 벌 줄 몰랐다는 사실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최소한 돈을 벌려고 애쓰는 피비린내 나는 노력을 안해도 좋고, 일단 돈을 번 사람들이 그 후에 겪는 여러가지 고민 같은 것을 안하니 우리 처지가 얼마나 행복하냐 하는 패자 자위 비슷한 것을 느낀다. 한걸음 더 나아가 어차피 죽으면 맨손으로 돌아 갈텐데 하는 거의 종교적인 체념을 가져보려고 하는 때도 있다.

 사업가들이 이런 얘기를 들으면 얼마나 웃으랴?

 그러나 우리도 종류는 다르지만 사업은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인생 자체가 하나의 사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인생의 사업이란 누구나 할 것 없이 시작과 끝은 동일하다. 요는 시작과 끝 사이를 어떠한 계획으로, 어떠한 인생관으로 메울 것인가 하는 데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결국 이렇게 생각하면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하는 사람들과 우리들과의 차이란 시작과 끝이 같은 인생사업의 중간처리 문제의 차이 뿐인 것 같다.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인가 또는 의의가 있는가 하는 것은 조물주 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사업하는 사람은 우리를 돕고 우리는 그들이 손을 못 데는 다른 부분을 개척함으로서 인생이라는 어항 속에 사는 물고기와 해초처럼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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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 쓰는 습관

 가끔 작품을 쓰기 위해 여관에 가서 며칠을 지낸다든가 시골에 파묻혀 한두달을 보낸다는 말을 듣는다. 자기 집에서는 도저히 작품을 쓸 수 없다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때로는 이상한 보조원을 대동하고 호텔이나 절에 가 있어야 작품을 쓸 수 있다는 옛 작가들의 이야기도 들어왔다. 자질 구례한 집안일이나 귀찮게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신경을 쓰다보면 모처럼의 창작력 집중에 금이 갈지도 모르니 분위기를 바꾸어 본다는 것도 이해가 될 만하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서재를 떠나면 글을 쓸 수가 없다. 불안감마저 뒤따른다. 여태껏 작품이다 논문이다 하고 비교적 많은 글을 써 온 터이지만 이러한 일들이 대부분 서재에서 이뤄졌다. 글을 쓰는 동안 애들이 드나들고 밖에서 전화가 걸려 오지만, 왜 그런지 집에서 글을 써야만 하는 습성이 생겼다.

 손쉽게 참고서적을 뒤적거릴 수 있고, 옆에 커피포트를 갖다 놓아 마음대로 마실 수 있다는 장점도 있겠지만, 확실히 집에서 일을 하면 생각의 실마리가 단절 될 우려가 있기는 하다. 그래도 집에서 글을 써야만 속이 풀리니 우스운 일이다. 친구들이 내가 퍽 가정적인 성품 때문이라고 농담을 하지만 최소한 글을 쓸 때는 가족하고는 관계가 없다. 훈도라는 직업 때문에 창작 이외에 글을 쓸 대가 많지만 그런 경우는 대개 날짜를 정해놓고 낮 또는 초저녁에 일을 한다. 그러나 창작이란 마음에 느끼는 대로 쓰는 습관이기 때문에 한밤중에, 때로는 밤을 지새워가며 쓴다. 한밤중 또는 새벽녘이 되면 집안은 심산유곡에 못지 않게 조용하다. 뿐만이 아니라 피곤과 권태를 몰아내주는 커피와 담배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으니, 구태여 집을 나설 필요는 없다. 대학 연구실에서도 틈틈히 글을 쓰지만 대부분이 이른바 잡문에 속하는 글이다. 중요한 글은 언제든지 집에서 써야만 한다. 만년필은 언제나 두 자루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두 자루를 다 쓰는 것은 아니다. 책상 한 구석에 여분의 만년필이 꼭 놓여 있어야만 마음의 안정을 느낀다. 몇푼이라도 좋으니 은행에 예금이 있어야 안심을 하는 아낙네들의 심리와 같다고 할까, 예비 병력처럼 쓰지 않는 만년필이 항상 눈 앞에 있어야만 하니 묘한 심리이다.

 하기야 옛날에 만년필의 질이 나빠 홧김에 쓰던 만년필을 내던졌던 경험이 있기도 하다. 물론 쓴 글의 질도 나빳다. 모든 책임을 가짜 만년필을 고가로 팔아먹은 상인에게 돌리기로 했었다. 만년필 안에 잉크가 가득 들어 있어도 꼭 잉크 병을 옆에 놓고 잉크를 찍어 쓰는 버릇이 있다. 잉크를 찍는다는 것이 노동력의 낭비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러한 습관도 혹시 만년필의 잉크가 말라 버리면 하는 불안감 때문인지 모른다. 또는 학생 시대에 펜대로 잉크를 찍어 쓰던 습관이 여태껏 남아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어떤 극작가가 나에게, 노란 종이가 아니면 생각이 막혀서 타이프의 키가 무색해진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이유를 따지자면 심리학자를 불러 그의 어렸을 때부터의 생활을 분석해야만 할 것이다. 창작이란 쌓이고 쌓인 생각을 종이에 쏱아 놓는 작업인데, 종이 색깔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빨간 줄무늬가 있는 원고지를 보면 일종의 저항을 느낀다. 이상한 자극을 느낀다. 뿐만이 아니라 종이의 질도 무제가 돈다. 반질반질한 종이로 된 원고지면 만년필의 운동이 그만큼 빠르고 미끄러울 것 같은데 이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종이는 보통 시험지에 여백이 많이 있어야만 애착이 생긴다. 줄무늬도 엷은 녹색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내가 쓸 원고지는 내가 인쇄소에 가서 만든다. 녹색은 젊음과 희망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녹색무늬의 원고지를 좋아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다, 마음이 가라앉기 때문이다.

 시장 문방구에서 파는 원고지에는 녹색이 없다. 빨간 것이 대부분이요, 가끔 검은 줄무의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노력은 더 가겠지만 손수 만들 수 밖에 없다. 붓대 하나만을 가지고 밥벌이를 한다는 초 인간적인 작가가 한국에는 거의 없는 줄로 안다. 가끔 작품의 질이야 어떻든 간에 붓 하나만 가지고 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자연 머리가 수그러진다. 그 용기와 노고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이러힌 사람들은 글을 쓰는 시간에 그리 구애되지 않을 줄로 안다.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글을 쓴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강의를 해야만 상황이 되는 우리같은 반직업적인 작가들에게는 창작하는 시간에 상당한 제한을 받는다. 나의 경우 창작을 하는 데 안성맞춤인 때는 방학 중이다. 사실 그동안에 발표된 나의 작품의 대부분은 방학기간 중 된 것들이다. 학교 일이나 바깥일에 질질 끌려 다니는 몸이고 보면, 떠오르는 생각을 그때 그때 메모하는 데 그칠 뿐 영 붓을 들 겨를이 없다, 그러나 방학중에도 글을 쓰는 시간은 밤 늦게 시작해서 새벽녘까지에 이르는 것이 보통이다. 낮이나 초저녘에는 시간이 남아도 영 붓을 들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가정 생활을 하는 데 이처럼 몹쓸 버릇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속필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속필가가 아니라 나의 생활형식이 나를 속필가로 만든 지도 모른다. 글 쓸 시간이 없어 오랫동안 생각하고 메모를 해두는 버릇이 있으니 일단 시작하면 모든 것이 거의 정리 된 상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새삼 세부 구성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러한 습관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지만 주 생활원이 창작이 아닌 사람에게는 부득이한 습관이다.

 낮에 글을 쓰지 않고, 초저녘도 글을 쓰는 데 좋지 않아 주위가 죽은 듯이 조용하고 어두워야만 슬슬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 얼마나 될 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하면 한심한 일이다. 가끔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고 자문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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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적 역

연극을 보다가 가끔 짜증을 내는 수가 있다. 주인공의 성격을 부각시키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배우가 그 역을 맡아 재미도 없거니와 피곤마저 느끼게 한다. 연출자가 가장 신경을써야하는 일이 적역을 찾는다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적역을 못 찾은 연출자를 나무란다. 신하의 역을 맡으면 훌륭히 해낼 배우가 연출자의 실수로 대왕의 역을 맡아 연극을 망치는  수가 허다하다.

 

 흔히 인생을 연극이라고 한다. 세익스피어의 말마따나 인간이란 주어진 시간에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떠들어 대다가 사라지는 서툼 배우일는지도 모른다. 사회라는 이름의 무대에서 직업이라는 이름의 배역을 밭아, 주어진 시간을 소비하다가 죽는 것이 우리들인지도 모른다. 이 주어진 인생의 시간이 너무나 짧음은 물론이다. 이 짧은 인생애서 가장 불행한 것은 적역을 찾지 못하고 헤맨다는 사실이다. 무대에서의 연극이라면 적역을 찾지 못란 책임을 연출자에게 물을 수도 있지만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그럴 수가 없다. 우리들 스스로가 연출자와 연기자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가끔 내가 하고 있는 일 또는 직업이 적역인가 하고 생각해 보는 때가 있다. 내 주위사람들의 역에 대해서는 곧 잘 판단을 하면서도 나의 역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친구 중에 15년 동안 대학교수를 하다가 무슨 생가게서 인지  훈돠는 역을 내동댕이 치고 사업계에 뛰어들어가 지금은 대성한 사람이 있다. 그는 적역을 찾은 셈이다. 구질구질한 명예나 지위 때문에 맞지도 않는 역에 매달려 인생의 서툰 배우로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적역인 사람이 정치를 한다고 가족을 굶겨가며 일생을 낭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연히 어렸을 때 작춤을 하나 쓴 실수로 문학을 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돌지도 않는 머리를 흔들며 다방을 배회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얼마든지 있다. 적역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는 주저없이 역을 버리고 새 역을 찾아야 할 터인데 우리에게는 그러한 용기가 없다. 또한 미스캐스트임을 자작할 때란 대개가 인생의 종막에 가까와졌을 무렵이다.

 남이 적역이 아니라는 것은 곧잘 알면서도 나의 역이 옳은지 그른지는 분간할 수가 없으니 인생의 배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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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아는 척 하는 일

아는 것과 아는 척 하는 것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하루하루를 성실껏 살아나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귀찮은 존재는 이 아는 척하는 무리들이다. 문학작품 몇 권을 읽고 문학은 죄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 한달 쯤 다녀 온 작자가 미국을 환히 알고 있는 듯이 말끝마다 미국 이야기를 한다. 엊그제 신문사에 취직한 사람이 언론에 건한한 둘째 가라면 화를 내며 언론은 환히 꿰고 있다는 듯 떠들어 댄다. 이런 사람들은 한두번 만난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의 성격. 가정. 그리고 사람됨을 완전히 파악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우리 주위에서는 '어설픈 무당 생사람 잡는다.'느니, '저 사람은 모르는 것이 없지만 아는 것도 없다.' 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이 아는 척하는 사람들의 말 중에서 가장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인생을 아는 척 하는 일이다.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는 와중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불쾌하기 짝이 없다. 삶의 희열은 물론 이렇다 할 고민도 경험한 적 없는 주제에 '인생은 다 그런거야' 또는 '인생은 그럴 수도 있어' 라는 한마디를 토해내 마치 인생의 스승인 양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아직도 새파란 나이에 이런 말을 서슴지 앉고 내뱉는 사람들을 보면 그야말로 인생이 서럽게 느껴진다. 그 말 속에는 마치 인생을 관조하고 관용을 베푸는 듯한 인상이 담겨 있지만 사실은 가장 무책임하고 비겁한 발언인 것이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다 미해결 상태로 죽어가는 철학가나 예술가들이 대부분인데 인생을 식은 죽 먹듯이 대하는 사람들은 용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무식하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가끔 강연회. 발표회 또는 세미나 석상에서도 나타난다. 연사나 발표자가 있는 능력과 성의를 다해 맡은 주제를 발표하면 으례 묻는 말이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식의 반문이다. 영어로 바꾸어 말하면 'So What?이 될 것이다. 학문이나 인생은 다 그렇고 그런데 어쩌자는 거냐는 반문인데 사실 이 반문을 만족시켜 줄 만한 답변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 부지런한 임금님이 계셔 밤잠을 안자고 백성들을 위해 궂은 일을 해 왔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의 진의를 이해해주지 않았으며 가까운 신하도 그를 외면했다. 이미 저승에 갈 나이가 된 왕은 실패작으로 끝난 자기의 인생을 한탄하며 삶의 의의에 대해 날이 갈수록 의혹이 짙어갔다. 그러자 측근의 어떤 대신이 나타나 '대왕, 인생은 다 그렇고 그런데 상심하지 마시오' 라는 위안의 말을 했다. 얼마 후 이 대신은 어떤 사건에 말려들어 역적으로 처형을 당하게 됐다. 대신은 그의 억움함을 직소하고자 왕 앞에 나타나 무죄임을 주장했다. 왕은 조용히 말했다. '대신, 인생은 다 그렇고 그런데 상심하지 말고 죽으시오.' 라고.

 인생은 그렇고 그런거라는 말은 당장에는 편리하고 대인같은 인상을 주겠지만 해결에는 하나도 도움을 못 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 또는 인생을 고민하고 추구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먼 조상들이 그랬듯이 우리든은 물론 우리의 자손들도 이 삶의 의의를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알고 그 의의를 찾으려는 고민과 노력, 그리고 성실성이 한없이 되풀이 될 뿐이겠지만,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인생의 의미가 방정식 풀듯 해결이 났다면 인류는 이미 오래 전에 멸종 되었을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아는 척하는 사람, 특히 인생을 다 알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간다. 그래서 한 개인의 생사의 문제도 농담삼아 해결하려는 풍조가 짙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인생을 심각하게 생각도 않겠지만 간혹 중요한 문제가 자신에게 닥쳐오면 당황한다. 자신의 문제만은 그렇고 그렇다 식의 무책임한 인생관으로 해결 될 수 없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알 수가 없지만 어떤 사람은 이 불가사의한 길을 알고자 애쓴 데 반해 이 전능의 인간은 참말로 알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음은 물론, 삶의 정도를 피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인생을 다 아는 척하는 사람들에게도 할 말은 있을 줄로 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특수한 시대와 사회에서는 너무나 이변이 많아 양식은 커녕 상식으로써도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는 일이 자주 생기기 때문이라고 할지 모른다. 무식이 양식을 내밀고 비정상이 오히려 판을 치는 이 순간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냉소와 외면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냉소외 외면 양쪽을 다 포함한 바로 '인생은 그렇고 그런데...' 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오랜 역사가 증명해주듯이 무식. 폭력. 비정상이 판을 치는 세상의 말로란 뻔한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의지와 양식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나가는 한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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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관 중

 배우나 운동선수에게 관중이 없는 가운데 연극 또는 경기를 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들은 직업을 포기 할 것이 분명하다. 그들에게 관중이 없는데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은 어부에게 물고기 없는 바다에 나가라고 당부하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관중이란 귀찮은 존재다. 대부분의 경우 이성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 관중이다. 배우나 선수들이 자기의 욕구를 채워주면 박수갈채를 보내 영웅으로 대해주지만 이 영웅이 다음번에 실수를 하면 욕을 퍼부으며 죽일 놈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리하여 배우나 선수들은 그 짧은 인생에 영웅과 죽일 놈 사이를 몇번이고 왕래하다 쓸쓸히 사라진다. 사회가 기계화되고 생활이 획일화 될수록 관중은 더욱 극성스러워진다. 관중은 생명이 없고 단조로운 일상 생활에서 발뺌을 하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관중에게는 책임이 없어 좋다. 마치 우리가 꿈에 대해 책임이 없듯이 말이 다. 인생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도 관중과 같은 태도를 취하면 고민도 책임도 없어 퍽 편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을 남의 연극이나 운동경기를 대하듯 보면 이처럼 재미있는 일을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의 인생이란 보는 입장에 따라 연극이나 운동경기와 별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정치가들이 선거운동을 할 때는 연극과 운동경기를 합친 것보다 더욱 재미가 있다. 최소한 공정하고 법을 존중하는 선거법 테두리에서 시행될 때는 말이다. 정치가들도 국민을 <유권자> 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부르지만 마음으로는 관중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일 것이다. 정치가 뿐만 아니라 기업가. 예술가 또는 성직자들도 관중의식은 대단할 것이라는 느낌이 간다. 아마 인간은 뛰는 사람과 그 뛰는 모습을 구경하는 두 종류로 나눠지는 모양이다.

 인생을 살아나가면서 관중적인 입장을 취하면 편리하겠지만 그러나 숙명적으로 인간은 배우와 관중의 이중성을 동시에 겸하게 되어있는 것 같다. 남의 일을 구경하듯이 대하면서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살다보면 부득이 나 자신이 배우가 되며 운동선수가 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비판하는 위치에서 우리는 비판받는 위치로 옮겨진다. 연극이나 경기에서 배우가 서툴고 선수가 지지리 못해봤자 시원스러베 욕설이나 퍼 붓고 귀로에 술잔이나 기울이면 그것은 이미 과거지사가 되어 우리는 별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이름의 연극이나 경기는 박수를 보내거나 욕설을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그 결과과 관중이었던 우리를 괴롭힌다. 이 괴로움을 타개하기 위해 관중이었던 우리는 부득이 배우와 선수가 되어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수많은 과거의 정치나 사회적 변동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우리는 가끔 '남의 일처럼 생각하지 말라.' 는 멀을 한다. 이것은 관중이 언제 경기의 당사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로도 풀이가 된다. 우리 주위에는 매사를 방관적 태도로 대하는 사람과, 사사건건 자기의 일처럼 흥분해 뛰어들려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물에 빠져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고만 있는 사람들에 관한 기사를 읽었는가 하면, 버스 안에서 행패부리는 깡패에게 충고를 하다 매를 맞는 한 중년 신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는 승객들에 관한 보도도들은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길을 지나다 알지도 못하는 부부가 싸움하는 것을 보고 뛰어들어 타이르다 봉변을 당했다는 사람도 있다. 결국 양쪽 다 도가 지나친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살아나가는 동안 관중의 입장만을 취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늘 주위의 모든 일에 뛰어들어, 관여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어차피 관중과 배우 또는 선수의 입장을 동시에 취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때  그리고 어느 상황에서 양자 중 어느 쪽을 취하는가 하는 마음의 태도에 있는 것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남의 일에 관계를 잃고 초연히 지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퍽 철학적인 인생 같지만, 인생이란 남의 일을 구경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모든 일에 뛰어드는 사람은 정열적이요 의협심이 강한 인상을 줄 지 모르지만 결국 실없는 인간이라는 말을 듣기 마련이다. 후자의 경우의 사람은 주위의 모든 사람이 관중이 되어 자기의 일거일동에 관심을 집중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정치가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매스 미디어를 동원한다.

 인생을 막바지 고개를 넘은 사람들은 그들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헛 살아온 인생이라는 말을 한다. 이렇다 할 화려하고 바쁜 생활을 못 해보았다는 탄식이 있는가 하면, 인생을 괜히 광대처럼 뛰며 보냈다는 한탄도 있다. 연극이라는 것이 배우와 관중이 공존할 때 가능하듯이 인생이라는 연극도 배우와 관중이 공존해야하며 특히 인생이라는 연극도 배우와 관중이, 그리고 관중이 배우가 될 때 그 실을 다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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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고뇌하는 젊음을

 가끔 명동의 인파 속에 끼어 걸어 갈 때가 있다. 걷는다기 보다는 오히려 인파에 밀려간다는 표현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이다. 명동은 분명 젊은이들의 영토가 되었다. 손바닥만한 명동에 무엇 때문에 젊은이들이 기를 써가며 몰려드는지 모르겠다. 명동에 있는 것이라고는 다방. 술 집 그리고 의상점. 구둣방 정도에 불과하다. 책방이나 극장이 증비하게 서 있다면 그런데로 이해가 가겠지만 정신 불모의 상징과도 같은 분위기 속에 밤낮 쏟아져 나오는 젊은이들이 의아하게 느껴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무슨 이변이 생겨 명동이라는 곳이 없어졌다고 하자. 그럼 젊은이들은 뿔뿔이 헤어져 각자 조용히 살 것인가? 분명 젊은이들은 제 2의 명동을 형성하고 여전히 인파를 이뤄 다닐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 이다.

 젊다는 것은 활동적이라는 말과도 같아 집안에 틀어박혀 있기에는 너무나 심신이 왕성하여 밖으로 튀어나올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명동을 주름잡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결코 활동적이어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들은 동질적 분위기 속에서 자기자신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흡사 외국에 나가 사는 동포들이 코리아 타운을 형성하여 이질 환경 속에서 동질적 친밀감을 경험하려는 심정과도 같을 것이다. 명동에 나오면 <내> 가 <우리> 가 되어 공동유대 의식을 갖게 되며 세삼 젊음은 가치가 있으며 외롭지 않다는 사실을 재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나> 는 항상 <우리> 라는 집단에서 영주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나> 로 되돌아 와야 한다. <나> 로 되돌아오면 항시 고독하고 불안하다. 그래서 이 고독하고 불안한 나를 <우리> 속에 내던져 잠시나마 외롭지 않다는 경험을 갖고자 한다. 무릇 참다운 일이란 고독과 고통 속에서 이뤄진다. 나를 고뇌의 밑바닥 까지 끌어내려 철저한 고독과 번민을 거쳐야 비로소 자기를 알 수 있고 가치있는 일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예술가가 그렇고 종교가 그렇고 교육자, 참다운 정치가도 그렇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란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고뇌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며, 고통을 겪지 않고 얻어진 지혜란 있을 수도 바랄 수도 없는 것이다. 희랍인 들이 지혜를 [고통을 통한 지혜 (wisdom through suffering)] 로 묶어서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요새 젊은이들은 밀려다닌다는 말을 한다. 혼자가 아니라 집단을 이뤄 생각하고 행동을 한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서 일하던 옛날 젊은이들하고는 차이가 있다. 집단을 형성한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의 허위와 무능과 권력을 비난하고 항거한다. 사실 요새 기성층은 젊은이들에게 칭찬받을 일보다는 비난받을 일을 더 많이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것은 오늘 날의 기성층도 한때는 젊은세대로 고생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사회 환경이란 요즘 젊은이들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암담했다. 철저한 식민통치, 해방 혼란기, 6.25 동란 등을 겪는 동안 고민 뿐만이 아니라 수십만의 젊은 생명마저 바쳐가며 여태껏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그때는 기성의 잘못이나 허위를 규탄하고 대들어 본 기억은 없다. 이제 사상 비할 수 없는 역경을 뚫고 살아남은 옜날 젊은 세대, 즉 오늘날의 기성층은 새 젊은이들로 부터 규탄을 받고 있다.

 요새 젊은이들은 기성픙의 일거 일동을 비난한다. 심지어는 기성이 입는 옷까지도 싫어한다. 와이셔츠, 넥타이, 검은 코트가 싫어 보다 자유스러운 복장을 택한다. 기성의 복장은 제도화 되고 획일화 된 답답하고 개성이 없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래서 영자가 붙은 쉐타나 통바지는 그것대로 젊은이들의 보편적이며 획일화 된 복장으로 되어버렸다. 짧은 머리가 역겨워 긴 머리를 나부끼고 다니지만 인제는 장발 자체가 젊은이들의 보편적이며 획일화 된 상징으로 변해버렸다. 거기에는 각 개인의 개성도 없고 창조성도 없다. 오히려 기성층의 그것보다 더욱 획일화 된 테두리 안에 자기 자신을 굳혀버려, 그만큼 빨리 늙는다. 젊은이들의 겉모양이 한국 젊은이들의 창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서구의 것을 그대로 모방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기성층이 오히려 걱정을 한다.

 꿈이 있어야 하고 개성이 있어야 할 젊은 <내>가 뿌리 없이 밀려다니는 <우리>를 형성하여 그<우리>를 강조하기 위해 외형적인 유행만을 내세우는 모습이 서럽다. 인류의 역사란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 보다 나아지거나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엿보일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전세대의 인간보다 나아지려면 그만큼 생각을 더 많이 하고 더 고생을 해야한다. 과연 오늘날의 우리 젊은이가 그들이 규탄하는 기성층보다 더 생각을 많이 하고 더 많이 고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바라는 젊은이는 구름처럼 모여 앉아 합창이나 하듯 젊음을 자랑하는 백명의 젊은이 보다는 혼자서 생각하고 꿈꾸고 번민하는 한 사람의 젊은이다. 철저히 생각하고 철저히 고민을 하는 사람만이 젊음을 내세울 수 있는 자격이 있을 것이다. 

 젊은이의 꿈은 그것이 클 수록 좋다는 말을 한다. 꿈이 상상적이어서는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너무나 현실적일 때 젊은이는 빨리 늙는다. 되건 안되건 그 꿈은 사회.민족.국가. 한걸음 더 나아가 인류를 위한 꿈일 때 그 꿈은 젊은이의 꿈이며 웅대한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데 취직하고 돈 많이 벌어 큰 집 사고 자가용 사는 꿈이란 젊은이의 것이 아니다. 자녀를 기르기 위해 24시간 돈만을 생각하는 중년층의 하잘것 없는 생각과 다를 것이 없으며 이런생각을 꿈이라고 믿는 젊은이는 기성층을 비난할 자격도 없다.  왕왕 학창시절에는 그처럼 젊음을 내세우던 청년이 일단 직장을 얻어 들어가면 깜짝 놀랄 정도로 빨리 그리고 쉽게 기성 세대에 동화되는 경우를 본다. 이것을 성숙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의 젊음 구가는 기성과의 기회균등만을 염두해 두었을 뿐 일단 생활 안정이 이뤄지면 쉽게 성숙을 내세우는, 개성도 없고 꿈도 없을 사람들이다.

개성이 없고 신념이 없는 중년일 수록에 매 대화 할 때마다 '나ㅇㅇㅇ은 이래봬도...' 라고 자기 이름을 내세운다. 그러나 우리는 이름이란 번호와 같은 것으로서 그 자체에는 아무런 뜻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젊은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젊고, 젊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복장을 내세워야 새 세대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면 전자는 중년 인사가 자기 이름을 내세우는 것하고 차이가 없다. 나이가 젊고 특수한 복장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젊은이의 개성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개성은 본인이 보여주어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소리 없이 상대방에 전달되는 보다 깊은 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개성이 없고 하는 일에 자신이 없는 연애인일수록 특별난 옷을 입고 나돌아 다닌다. 마치 그 특수한 그리고 화려하거나 야한 복장이 그들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젊은이의 공통된 유행복을 입고, 이성과 대낮에 팔을 끼고 다니고, 유치한 유행어를 만드는 외형적 표현을 통해 젊은 개성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은 그들이 걱정하는 기성층 이상으로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란 공동 운명이나 유대 의식을 표현한다. 우히는 사회속의 개인이다. 개인은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지 않고는 이 사회에서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란 유쾌한 일보다는 귀찮은 경우가 더 많다. 손해를 보고 피해를 보는 관계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이 까다롱운 관계는 더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알면서 속은 체하고 손해보면서 모르는 척하며 살아나가야 할 때가 생긴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도 나에 대한 꾸준한 생각과 확립된 개성이 생겼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항상 이해관계를 전제로 내세우게 된다. 나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 만이 나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 심지어는 어린애들까지 집에 좋은 선물을 들고 찾아오는 손님만을 존경하는 풍습이 생겼다. 요새 젊은이들은 너무나 실리적이라고 혀를 차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한 풍조로 만든 것에는 기성층에도 많은 책임이 있다.

사회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는 장소지만 이 관계가 우리들 개인에게 적잖은 희생을 요구할 때가 있다.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것보다는 이쪽에서 주는 경우가 많다. 네가 또는 사회가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하고 불만을 터뜨리는 젊은이들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치고 타인을 위해 희생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철저히 주고 받는 양이 동일하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은 나를 돕고 밀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기성을 탓하고 그 무능을 비웃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그 기성이 구제의 손길을 내밀어주기를 은근히 기다린다. 

 <방황하는 젊은이> 라는 말을 흔히 쓴다. 그러나 이 말을 퍽 비극적으로 사용한다. 오늘날의 방황하는 젊은이가 퍽 암담하게 느껴지는 듯한 착각을 준다. 그렇지만 주막으로, 명동으로 육체를 끌고 방황하는 젊은이는 몰라도 자기의 정신영역 속에서 방황하는 젊은이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과학기술의 시대가 돼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국민 학교때부터의 이른바 미국식 교육인 OX 위주의 교육 때문인지는 몰라도 요새 젊은이들은 모든 것을 OX식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어째서 기성층은 분명하게 젊은 세대가 살아야 할 길을 치과 의사가 정확히 썩은 이빨을 골라내듯이 지시해주지 않는가라고 한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은 수학공식이 아니다. 그 어떤 성인도 이 길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꼬집어 제시해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각자가 찾아야 한다. 찾기 위해서 방황을 해야한다. 흡시 옳은 광맥을 찾기위해 2,30년을 산각벽지를 누비고 고생하는 지질학자와 같이 정신적 방황은 청년의 속성이며 인간형성에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여정인 것이다. 방황이 고생스러워 한탄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세계의 십자가를 혼자 지는 것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의 방황하는 모습을 과시하는 노출증 환자의 모습은 더욱 곤란하다.

 어떻게 보면 인생은 방황의 여정 그 자체이기도 하다. 청년의 정신정 방황은 그것이 보다 강하고 진실하다는 사실 뿐이며 우리는 죽을때까지 의혹과 이뤄지지 않는 꿈을 위해 번민한다. 청년시대에 일생을 꿰뚫을 수 있는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고 일로 매진한다는 것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지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세대간의 대화> 라는 말도 자주 쓴다. 기성층과 새 세대간의 진실한 말을 뜻하지만 이 경우에도 대게는 기성층에게 오히려 부담을 주는 경우도 많다. 젊은층의 불만을 듣고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 기성층의 입장이다. 젊은 층은 할말을 다 한다.이에 대해 기성층은 미안한 마음으로 젊은 사람의 말을 듣고 이해를 했다고 고개를 끄덕여야한다. 나는 세대간의 대화라는 말 자체에 저항을 느낀다. 사회란 특수한 연령층만의 것이 아니라 일생, 각 연령층이 만나고 서로 도와 일하는 장소다. 내 나이 아직 사십줄이지만 나는 육칠십대의 스승이나 선배들과 세대간의 대화라는 퍽 전투적인 분위기를 경험한 적이 없다. 기성층이 일방적으로 젊은 층에게 자기변명을 하며 그 이해를 강요하는 것도 싫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싫다.

 

 언제 어느 때부터 생긴 풍조인지는 모르지만 - 매스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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